2015-09-15 초가을 분위기가 나름 보입니다


그런중에... 일해야 합니다. 사는것이 다 글츄?












출퇴근시 늘 노트북과 외장하드 그리고 기타 잡다한 것들을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오랜 세월(?) 메고다니던 백팩이 낡아서 바꿔야 하나 싶던차에

디자인도 무난하고 수납공간도 오밀조밀 다양하게 잘 갖추어진 제품을 우연한 기회에 싼가격에 살 수 있어서 만족이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첫눈이 내리던 2013년 11월 19일 하루







지난 몇년간 니콘 똑딱이 디카를 사용하다가 큰맘먹고 새로나온 SONY DSC-RX100M2를 (2013년 10월 2일)삿는데, 성능은 익히 알려진대로 꽤 맘에 든다.

커다란 DSLR의 성능과는 차이가 나겠지만 컴팩트한 똑딱이 크기에 가격대비 성능은 DSLR 수준(?)되는 놈이라서 휴대하기 편리하고 촬영된 사진의 화질 또한 맘에든다.



DSC-RX100M2로 촬영한 사진 (사진을 클릭시 원본 사이즈로 볼수 있음)




내가 살아 오는 동안 이성의 눈뜸 이전에 막연히 떠오르는 기억 하나의 추억속에 잠겨 있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 그녀는 영원의 세상으로 떠났다.

저녁 늦게쯤 부고를 받아들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2주일째 지리하게 이어지는 장마의 빗발이 굵어지는 사이로 달려갔었고, 마지막 가는길에 국화꽃으로 장식된 그녀의 영정 앞에, 망자를 향한 향을 피우고 절을하면서 ........... 생각이 깊어지더라..

= 이하 감성적인 느낌 생략 =


황순원의 "소나기" 처럼 떠오를 그녀가 생각키워 소나기 쏟아 붓는 오늘 기억을 잊지 않으려 잠시 이곳에 놓아본다.

2013년 07월 16일 그녀가 떠나간 날이다.



하얀 국화꽃속에 너 웃고 있지만 내 가슴이 기억하는 넌 지난 가을 어느날인가 다 늦은 저녁에 거의 35년만의 해후 그리고 짧은 저녁식사 그것이 35년만에 보는 너의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 되겠구나.... ㅠㅠ


잘 가라~~~~~~~!

모르긴 해도 육신의 고통과 심적으로 격었을 고통이 그 얼마나 미련으로 남았을터,

잘 가렴~~~~~~~~! ㅠㅠ


지금 시간은 2013년 7월 17일 새벽 03시 03분이다.

너의 하늘길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술잔을 기울이며, 옛 기억을 더듬다가, 바보같은 놈 뭐가 그리도 바빠서 벌써 가버렸니 하는

푸념 섞인 혼잣말을 되뇌여 본다.


안녕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갈길이니 다시 만날 그쪽 세상이 궁금할지니........


잘 자라 친구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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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 황순원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 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소녀가 나타나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지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몸을 가릴 데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메밀밭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아래편으로 한 삼 마장쯤, 소년은 우대로 한 십 리 가까운 길을 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 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 봬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서울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소녀의 눈이 금새 ‘바보,바보,’할 것만 같았다.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허수아비가 자꾸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저만큼 허수아비가 또 서 있다. 소녀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소년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다보니, 소녀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좀 전 허수아비보다 더 우쭐거린다.
논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뛰어 건넜다.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원두막.”
“여기 참외, 맛있니?”
“그럼, 참외 맛도 좋지만 수박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개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소녀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 없어 못 먹겠다.”
소년이 더 멀리 팽개쳐 버렸다.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떠올리며.
다시 소년은 꽃 한 옴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소녀는
“하나도 버리지 마라.”
산마루께로 올라갔다.
맞은편 골짜기에 오순도순 초가집이 몇 모여 있었다.
누가 말할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꽃이지?”
적잖이 비탈진 곳에 칡덩굴이 엉키어 꽃을 달고 있었다.
“꼭 등꽃 같네. 서울 우리 학교에 큰 등나무가 있었단다. 저 꽃을 보니까 등나무 밑에서 놀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줄기를 잡고 끊기 시작한다.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칡덩굴을 그러쥐었다.
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며, 소년은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일어나 저 쪽으로 달려간다.
좀 만에 숨이 차 돌아온 소년은
“이걸 바르면 낫는다.”
송진을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고는 그 달음으로 칡덩굴 있는 데로 내려가, 꽃 많이 달린 몇 줄기를 이빨로 끊어 가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농부(農夫)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
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 내면서,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 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소녀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안고 온 꽃묶음 속에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 밑에 버린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더 거기서 비를 그을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 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 됐다. 앞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멀개졌다.
수숫단 속을 벗어 나왔다. 멀지 않은 앞쪽에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붓고 있었다.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그 뒤로 소녀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살피기도 했다. 남 몰래 5학년 여자 반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뵈지 않았다.
그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 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어쩐지 소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소나기 맞은 탓 아냐?”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제 다 났냐?”
“아직도…….”
“그럼, 누워 있어야지.”
“하도 갑갑해서 나왔다. ……참, 그 날 재밌었어……. 그런데그 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소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그래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년은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 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 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갈림길에서 소녀는
“저,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서 대추를 땄다. 낼 제사 지내려고…….”
대추 한 줌을 내준다. 소년은 주춤한다.
“맛봐라. 우리 증조(曾祖)할아버지가 심었다는데, 아주 달다.”
소년은 두 손을 오그려 내밀며,
“참, 알도 굵다!”
“그리고 저, 우리 이번에 제사 지내고 나서 좀 있다. 집을 내주게 됐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 초시 손자(孫子)가 서울서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난 이사 가는 게 싫어졌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낯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 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더러 병이 좀 낫거들랑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것, 바보 같은것.
이튿날,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닭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도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안고 있는 닭의 무게를 겨냥해 보면서,
“이만하면 될까?”
어머니가 망태기를 내주며,
“벌써 며칠째 ‘걀걀’하고 알 날 자리를 보던데요. 크진 않아도살은 쪘을 거여요.”
소년이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서당골 윤 초시 댁에 가신다. 제삿상에라도 놓으시라고…….”
“그럼, 큰 놈으로 하나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이 말에, 아버지는 허허 웃고 나서,
“임마, 그래도 이게 실속이 있다.”
소년은 공연히 열적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외양간으로가, 쇠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체.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 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오늘 2013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아버지를 뵈러 다녀왔습니다.

평소 자주 찾아뵙지 못했기에 현충일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남들은 현충일이라고 다들 찾아오는데 찾아뵙지 아니하면 혹여 외로우실까 싶어 오랜만의 방문이었습니다.


늘 그렇지만 오늘도 현충원 앞 인도를 꽉 메울 정도로 참으로 많은 추모객들이 방문을 하더군요.

여기저기 참배를 하는 이들과, 참배를 마치고 나무그늘에 모여앉아 준비해온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분들....등등 구석 구석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아버지를 뵈러 충혼당으로 올라가면서 제일 먼저 사진전시관에 들러서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이 건재(?)한가를 확인 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만4년전인 2009년 6월 13일날 이곳 사진전시관을 우연히 들렸다가 노무현 대통령 사진만 부재중인 사실을 발견하고 최초로 문제 제기를 했던 당사자인지라, 만4년이 흐른 오늘 현재까지 잘 계시는지 확인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래는 당시에 쓴 글들 입니다.


지난 2009년 6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제 부친을 뵈러 갔다가 "사진전시관에 노무현 대통령만 부재중"인 사실을 발견하고 당일 자정을 넘겨 14일 새벽 3시경 문제 제기의 글을 본 블로그에 올린 후 다음포털의 아고라와 사람사는 세상을 통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위의 링크 글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 제기 4일째 이후 노무현 대통령 사진을 추가했다는 현충원의 공지가 뜨고, 다시 현장을 방문하여 확인을 하려던 것이 먹고사는 일이 바쁘다 보니 차일피일 미뤄졌었고, 제가 한국에 있지 아니했던지라 더더욱 늦어졌습니다.



사진전시관


사진전시관 1층 오른쪽에 있는 제3전시관에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과 함께 주요 업적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최초 문제제기 당시 부재중이던 노무현 대통령, 문제 제기 4일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되었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합니다.

당시에 현충원은 "공간이 부족해서, 리모델링 할 예정이라서 노통 사진을 준비하지 않았다" .....라는 변명을 하더니 4년이 흐른 지금까지 전혀 변한것 없이 그대로입니다.

결국 입에발린 거짓 변명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노통 좌측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정면으로 한컷 찍어봅니다.


사진전시관 곁에 현충관


사진전시관을 마주 바라다 보고 있는 유품전시관


사진전시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건재를 확인하고 아버지가 모셔진 충혼당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바라다본 수많은 영령들




아버지에게 가기전에 먼저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뵙니다. 묘역이 있는 언덕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묘역 입구


김대중 대통령 묘역 입구 안내석


김대중 대통령 묘역 입구 안내석을 지나 이길로 접어들면 묘역이 있습니다.


위에 작은 길을 따라가면서 곁에 보이는 울창한 나무들


김대중 대통령 묘역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묘역 규모에 비해 현격히 소박할 정도로 작아 보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뵈러 올때마다 매번 김대통령 묘역을 참배 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참배를 합니다. 어떤 연세드신 할머니 두분이 참배를 마치고 걸어가면서 "언니덕에 출세했네, 이런 곳엘 다 와보고" 라는 말씀들을 하는것이 들립니다.


현충원 경내가 워낙 넓어 걸어다니다 보니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기온이 높아 땀이 비오듯합니다.

미리 준비했던 수건으로 미쳐 닦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내립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저도 분향을 하고 참배를 했습니다. (참배중인 저분 저 아닙니다)



김대통령 참배를 마치고 다시 묘역 앞의 도로를 따라서 이제 제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다시 마주치는 수많은 영령들


저 멀리에 제 아버지가 모셔진 충혼당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충혼당 앞에 참배를 위한 향로와 참배대가 보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꽃을 드리고 갔군요.


이 충혼당은 납골당으로 운영이 되는 곳으로 제 아버지도 이곳에 모셔저 있답니다.  본 건물엔 이미 공간이 부족한 상태인데 우측에 공사중인 건물이 아마도 증축을 위한 공사인듯 합니다.



제가 늘 메고 다니는 가방이 놓여진곳 위 중간쯤에 제 아버지가 계시네요.  오랜만에 뵙기에 아버지께 절을 올렸지요.


충혼당을 바라보며 "또 오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떠나왔습니다. 아부지~! 저 가유 ! 담에 또 올게유.



5월 8일 어버이날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방문 했다.

현충원 입구 왼쪽에 있는 구내매점 건물 전경

분수대 연못

경내엔 봄을 재촉하는 꽃들이 만발하고......! 올해는 예년과 달리 날씨가 고르지 못했던지라 곧 여름 날씨의 더위가 다가오지 싶다.

아버지가 계신 충혼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김대중 대통령 묘소를 둘러보기 위해 가는 길목에서 노산 이은상님의 묘소를 발견.....

노산 이은상님의 묘소에서 몇 발자욱 떨어진 곳엔 이태영, 정일형 박사 내외의 묘소도......

김대중 대통령 묘소 입구

김대중 대통령 묘소 입구에 서있는 어록

생각했던 것 보다 매우 검소하고, 타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에 비해 매우 작은 김대중 대통령이 잠들어 계신 묘소

올해 초쯤이던가?  뉴스에서 들었던 방화 사건의 흔적이 남아 있다(사진 왼쪽 상단쯤에 잔듸가 파였던 흔적이 보인다)

김대중 대통령 묘소 바로 앞은 경내를 통행 할 수 있는 도로이면서 10여대 정도의 도로 주차가 가능하도록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묘소 바로 앞 도로에서 묘소쪽으로 올려다 본 모습, 방화 사건과 있을지 모르는 위해를 막기 위함인지 오른쪽으로 경비 초소가 세워져 있고 근무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타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에는 별도의 근무자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묘소 아래쪽으로 축대를 쌓고 꽃을 심어 놓아 한참 만개한 상태

잠들어 있는 수많은 영령들.................!

경내를 걸어가다가 발견한 숫꿩(장끼)

아버지가 영면하고 계신 곳인 충혼당이 멀리 보이고.........!
(국립서울 현충원에는 공간이 부족하여 별도의 건물을 새로지어 납골당 형태로 운영을 하고 있으며, 앞에 보이는 비석 형태로 묻히기를 원하는 분들은 대전 현충원으로 간다.)

충혼당 입구

충혼당

충혼당 건물에 새겨진 부조.....!

제사를 지내기 위한 가족실 건물과 방문 가족들의 식사를 위해 제공되는 휴식공간겸 식당 건물(모든 시설들이 깨끗하게 잘 갖추어져 있어서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준비해가거나,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음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편하게 쉴 수도 있다)

충혼당에서 아버지를 뵙고나와서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서 담소를 나눈다.

현충원 경내 뒷편에 자리 잡고 있는 호국지장사라는 절 입구이다

얼마남지 않은 오월 초파일을 준비하는 연등이 걸려 있다.

절이 위치해 있는 곳이 현충원 경내이면서 매우 깨끗하고 아늑하여 조용하게 돌아 볼수 있으며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다.

절 입구를 지나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이다)

까지도 만나고.........!

제1 장군 묘역에서 내려다 본 충혼당 모습

현충원 경내가 잘 가꾸어진 공원처럼 조용하고 깨끗하여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충원 입구에 있는 분수대

어머니를 모시고 명동 칼국수를 먹기 위해 명동으로 이동......명동은 언제나 만원~!

명동 칼국수집이다. 이때가 오후 5시쯤이어서 나름대로 한가로운 시간이라 편하게 식사를 했다.

1. 사이트가 해킹을 당하다.

비즈니스용으로 약 8년째 운영해 오고있는  사이트에 최근 해커가 침입을 하여 낚시질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리다이렉션인데, 사이트에 접속하면 이상한 링크를 타고 들어보지도 못한 은행 뱅킹화면이 뜬다.
요즘 기승을 부리고 있는 보이스피싱 비슷한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넘어진 김에 쉬엇다가고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전면 리뉴얼하려고 새로운 게시판 보드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느라 요즘 본 블로그는 거의 개점 휴업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약 한달 이상은 일에 매달려야 한다.


2. 500기가 바이트 하드디스크를 지르다.

외장하드가 서너개 있지만 요즘 이런저런 덩치큰 파일들을 받다보니 저장공간이 부족하여 당장 꼭 필요한 것들 외에는 눈물을 머금고 삭제를 해야하는, 공간 부족에 따른 불안함 때문에 큰맘먹고 500기가 하드 디스크를 새로질렀다.
이제 당분간 편안하게 작업을 해도 되리라.....!
500기가라고는 하지만 요즘 가격이 많이 착해져서 부담은 덜하다.


당분간 개점 휴업일수도 있는지라 대략 살아있다는 흔적만을 남겨본다. ㅠ.ㅠ
일전 주말 저녁에 거의 17~8년 전부터 온라인을 통해 알게된 옛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름하여 PC통신 띠동호회 친구들이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통신 수단이 발달되어 그 시절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많겠지만, 케텔, 하이텔, 천리안 그리고 좀 나중에 출현한 나우누리, 유니텔 등등, 다이얼업 모뎀을 통해 접속하여 파란화면을 배경으로 게시판에서 글을 주고 받거나 밤샘 채팅으로 날새는줄 모르던 옛친구들이다.

그때 그 친구들이 이제는 중년의 아짐과 아저씨들이 되고 희끗해진 머리카락 만큼이나 살아온 년륜들이 쌓여 마음도 몸도 넉넉해짐을 느낀다.
재미 있는것은 어언 18여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각자의 본명을 아직도 다 모른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 옛날의 통신상 닉네임만이 존재하는 그런 친구들, 어쩌다 아래 사진처럼 모임자리에서 OO님이라고 불리고 부르며 한잔술에 목소리가 커질라치면 생소한듯 힐끔거리며 돌아다 보는
옆자리에 낮모르는 젊은 사람들의 눈길들을 느낄 수 있다.
시쳇말로 저렇게 나이든 사람들도 OO님 이라는 온라인 용어를 쓰나싶은 .... 당췌 어울릴것 같지 않은 아짐과 아저씨들 뭐 그런 뜻의 눈빛이 아닐까 싶다.

족발과 파전에 동동주 한사발, 그리고 이야기 꽃이 피는 수다마을.

오가는 이야기와 입안에 착착 감기는 시원한 동동주 ( 요즘 한국은 막걸이 열풍이다 )

옛날 옛적 PC통신 게시판, 그때의 친구들,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 등등 이어지는 추억 덩어리들

막걸리잔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끝에 한친구의 느리게 걷는 트래킹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당일에도 마침 모임 자리를 마치면 다른 야간 트래킹 행사에 참가를 한단다.
얼큰한 취기에 옛날 군대적 행군을 떠올리며 트래킹에 따라나서 보기로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입고나온 옷 그대로 신고나온 신발 그대로 짊어진 가방 그대로 따라 나서기로 했다.

술자리를 떠나 트랙킹 팀들과 합류하기 위해 출발하기 직전 음식점문을 나서며 (갑장 친구들) .... 초상권 보호를 위해 촛점이 맞지 않은 사진으로 은근 슬쩍 대체 .... ㅋㅋㅋ

트래킹 출발지점에서 준비 ...... 오늘 우리의 트래킹 코스는 한양대학교앞 다리밑에서 출발하여 동부간선도로 자전거 도로와 조깅길을 따라 쌍문 전철역까지 가는 18Km 거리를 약4시간에 걸쳐서 걷는 길이다.

드디어 트래킹 팀들의 중간 기착지에서 야식을 준비하는 지원조를 한양대학교앞 다리밑에서 만났다. 원래 트래킹 모임의 출발지는 이곳이 아니고 초저녁에 벌써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이곳을 중간 기착지로 정한 곳이란다. 우리는 중간 기착지에서 합류를하게 된셈이다.
트래킹 모임을 주관하는 팀에서 다리밑 중간 기착지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고 저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초저녁에 출발한 멤버들의 행렬이 나타나게 될것이다.
(이때가 밤 12시경)

이곳에서 야식을 마치면 저 앞에 보이는 길을따라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출발하게 될것이다.

트래킹 멤버들이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여 야식을 먹고 있다. (이날에 메뉴는 미역국과 공기밥, 막걸리 등등...) 전체 회원이 약 2천명 정도라는데 이날 참가자는 약 100여명에 가까운 남녀노소 구분없이 다양한 연령층들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중간 기착지에서 합류한 관계로 회비도 안내고 덤으로 막걸리에 미역국 한사발 얻어 먹었다.

취중에 똑딱이 카메라를 들긴 했는데 야간이라 더더욱 촛점이 안맞았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이 또한 무엇을 찍으려 했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그림이다.

걸어가며 흔들리며 한컷, 중랑천변을 걷다가 아파트쪽을 향하여.....

수삼년을 천천히 걷는 트래킹에 매료되어 수시로 걷고 있는 매니아 왼쪽 아짐과 또 다른 오른쪽 아짐은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채로 18Km를 완주 했다.  아주 독한 아짐이다. ㅎㅎㅎ ( 갑장 친구 아짐들 )

뭔가를 찍으려 했었는데, 또 다른 재미있는 그림

2시간쯤 걸었나 싶은데 어느 지점에 아담한(??) 캠핑카 비스므리한게 서있어서, 야간 분식을 파는 노점인줄 알았다.   그러나....간이 화장실

중랑천변에 예쁘게 피어있는 메밀꽃

10분간 휴식시간이다......걷다가 쉬다가 쉬엄쉬엄 이야기 꽃을 피우며 걷는다.
공기는 약간 서늘하고, 찬 이슬이 내려 앉는 시간 기분은 그런대로 상쾌하다.

약 4시간 30분에 걸쳐서 18Km를 완주하고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몸풀기, 이때가 새벽5시 30분 전후쯤, 점차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주변에는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출근하는 사람 등등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많더라.

우리 일행은 트래킹팀이 예약해 놓은 감자탕집에서 허기를 채우고 각자의 근거지 앞으로 ...... 그리고 거의 하루동안 잠속으로.....빠져들다.
아무튼 밤을새워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만들었음에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건강들 하시게나......!

초저녁에 마셨던 막걸리 취기가 밤새 가시지 않아서 ...... 지치는줄 모르고 걸었던 시간이었음.   ^)^

이제 며칠 있으면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전에 방문했었던 중경(총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모습을 올려 봅니다.

대부분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잘 알고있지만 중경 임시정부청사는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듯 합니다.
중경은 사천성에 속하는 행정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사천성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특별행정 구역으로 되어 있으며,  지역적으로 중경은 매우 습하고 더운 지방이라서 오래된 건물들은 이끼가 끼어 약간은 검은색을 띄게 되는데 임시정부청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관리인은 중국인이며, 한국어를 하지 못하더군요.
찾아오는 한국인들도 별로 없어 한적한 느낌마져 들기도 합니다.

도로변에 서있는 안내 입간판 입니다.

전면에 보이는 계단 오른쪽 검은색 기와지붕 건물, 아래로 부터 위에까지가 임시정부 청사이며 국기 계양대 오른쪽 한글이 보이는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 숲에 가려져 있어서 약간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입구 안쪽에 있는 중경 임시정부청사 안내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래 상해에 있었지만 일본군에 쫒기면서 위 사진에 보이는 화살표 경로를 따라 여러곳을 전전 하다가 중경까지 옮겨 가게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중경에서 광복을 맞게됩니다.

건물 실내 2층 로비에 있는 김구 선생님 흉상과 국기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회의하던 장소 입니다.

김구 선생님 집무실과 사무집기들




며칠전 홍콩에 계시는 아이미슈님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홍콩의 대표 해변관광지 리펄스베이[淺水灣]를 가다."라는 포스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BlogIcon 쏘울 2009/07/27 00:24

지난해 어느 봄날 약 5시간 동안을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일이 있었을때 리펄스베이[淺水灣] 여기를 혼자 갔다가 정말 따분하게 어슬렁 거리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ㅠ.ㅠ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저기가 별로 재미없는 동네 입니다. ㅎㅎ

근데 저는 저기를 스텐리로 알고 있었는데, 리펄스베이[淺水灣] 인가요?


그래서 똑같은 제목으로 그때 갔었던 사진을 뒤적여 찾아서 올려 봅니다.

침사추이에서 만난 유람선

스텐리 리펄스베이로 가는 길목에 높다랗게 서있는 아파트, 높은 빌딩 형태인데다가 산위에 있는 건물이어서 건물 꼭대기엔 늘 안개와 구름이 걸려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다가 .... 바람이 불면 휘어질것 같은 불안한 느낌도 들고, 태풍이라도 오면 꼭대기 층쪽에 사는 사람들은 대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 별생각이 다들더군요. ㅎㅎㅎ

해변가에 있는 멋진 건물, 4월이지만 춥지 않은 날씨인지라 남여 한쌍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때가 4월이어서 해수욕장은 한가로운 풍경 입니다.

홍콩에 국제적인 무역항구가 있는지라....멀리 컨테이너 화물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해변관광지 리펄스베이[淺水灣] 안내지도

해변가 휴게소에서 바라본 모습

이거 뭐 전문 글쟁이도 아니고

편견타파!! 릴레이라~~~~~~~~~!

RedMedusa님이 편견타파!! 릴레이 바톤을 넘겨주셔서 얼떨결에 받았습니다.
아래 글에도 썻습니다만 남의글 훔쳐 본 죄값이었는지 몰라도 본의 아니게 넘겨 받다 보니 글을 다 써놓고 어디부터 트랙백을 보내야 할지 몰라 여기 저기 두리번 거리면서 앞으로 며칠 동안 편견타파 릴레이 주자들을 색출(??)하여 트랙백 날리기를 해얄것 같습니다.  ^_^

아래 내용이 주자들에게 전달 되는 것인듯 한데 마감 시한이 다되어 가는지라 바톤은 넘기지 않겠습니다.

1. 자신의 직종이나 전공 때문에 주위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를 써 주세요.
2. 다음 주자 3분께 바톤을 넘겨주세요.
3. 마감기한은 7월 31일까지 입니다.


얼마 전 평소에 내가 자주 방문하던 어떤 이의 블로그에서 누군가 써놓은 편견타파!! 릴레이 주제의 글을 몇 편 읽었지만 그게 돌고 돌아서 내게까지 올 줄은 몰랐다.

최근에 내가 봤던 편견타파!! 릴레이 글 중에는 이름 석자만 대면 한국인 누구나 다 아는 분의 글도 있고 해서 그냥 글쟁이 수준의 유명 파워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이런 행사 내지는 이벤트도 있구나 했더랬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만연되어 있는 편견을 타파해보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의미이겠거니 또는 사이버 세상에서 알음 알음으로 닉네임으로만 알고 또 블로그에 올려지는 글을 통해 그 블로그 주인장은 어떤 성향의 어떤 직업의 또는 어떤 취향의 사람이겠거니 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자기 주관적인 막연함을 타파해보고자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주제의 돌림 성 글을 주고 받는 것이 겠거니 했다.

편견타파!! 릴레이 주문을 받아 들고나서 어떤 주제로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너무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개겨(??) 말어 여러번 생각을 하다가 바톤을 넘겨준 분의 성의를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뭔가는 써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쓰려니 내가 뭐 글쟁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파워 블로거 수준의 다작을 생산해내는 그런 능력을 겸비한 인간도 아니고 해서 뭔 소릴 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그렇다고 블로거 세계에다가 상업적인 냄새를 피울 수도 없고, 사적인 시시콜콜한 내용을 가지고 모두 까발려 날것으로 드러낼만한 꺼리도 없으며, 또 그렇다고 대놓고 나 누구요 하는 식의 개인 프라이버시 마저 까발릴 만큼 간뗑이가 널널하지도 않은 주제에 무슨 썰을 풀어 볼까나~~~~~~!

뚜렸한 주제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자판이 움직이는 대로 써대다 보니 글은 길어졌으되 알맹이도 없이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된것 같아 애초에 의도했던 편견타파 릴레이성 글이 될지 의아 스럽지만 이것으로 숙제를 했다고 봐주시면 좋겠다.


1. 아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이미 본  블로그 대문에 걸어놓은 대로 쏘울은 꽤 오랜 시간 동안 IT 산업에 종사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기술개발 쟁이 짓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컴퓨터라는 물건은 그것이 우리 인간들 곁에 처음 등장하던 시절부터 가까이하게 되었고 인터넷이라는 인프라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통신이라는 매체에 숙달이 되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사이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같은 세대의 친구들에 비해 빠른 접촉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굳이 나이를 발설하지 아니한다면 요즘 세대들과도 세대차이 없이 눈치 채이거나 들키지(??) 않고 온라인상의 전문 용어를 구사하며 잘 놀 수도 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은연중 어느 순간 밥그릇 숫자를 알게되면 아니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대단하십니다 !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일과 관련한 것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스스로 해결하는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내가 운영하고 있는 비즈니스용 웹사이트 3개가 있는데 여기에 필요로 하는 웹디자인, 웹프로그래밍, 그래픽 디자인 등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 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업무용 카탈로그를 만들 때에도 그래픽 디자인과 광고카피 문안까지 다 넣어서 완성한 다음 출력소에 넘겨 해결 하거나, 사무실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용이든 개인용이든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관련한 것들 또한 스스로 해결한다.

아무튼 내가 필요로 하는 웬만한 것들은 스스로 해결을 하는 편인데, 가끔 온라인 상에서 또는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 보면 아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이 말은 당신 처럼 노땅도 그런걸 다 할줄 안단 말이요? 라는 뉘앙스의 편견 아닌 편견이 자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노땅이란 표현을 하므로 인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는 오해 마시라, 쏘울은 정말로 늙은이가 아니올시다 란거다.

옛 어른들 말씀에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제 쬐끔 나일 먹다 보니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난 아직 안 늙었단 말요.  나도 누구보다 신세대이며 당신들이 하는 것들 웬만한건 당신들 보다 더 많이 안다고요.

내가 평소 자주하는 말 중에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기와 전문적인 부분이 있다 라는 것이 있다.


배움이 길든 짧든 아니면 아예 학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전문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그게 지식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무언가 일을하고 해결을 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전문적이고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얼마전 Cantata님의  ◆ 편견타파 릴레이 :: 컴퓨터 전공한다고 컴퓨터에 대해 박사여야하냐! 라는 글에 나 또한 살아오는 동안 똑같은 말들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백만배 천만배 공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다.

쏘울 2009/07/17 23:56

음, 릴레이 글 훔쳐보는건 잼있는 일이며, Cantata님 글은 내가 살아오며 수십년을 들어온 그대로를 현대적인 인터넷이라는 통신과 접목이 되어 있는 것만 빼고는 똑같은 패턴이군요 ㅎㅎㅎ

암튼 앞으로도 수십년은 더 같은 소리와 요청을 들어야 하니 미리부터 너무 힘써서 주변을 행복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ㅋㅋㅋ
왜냐믄, 주변을 너무 행복하게 만족시키면 습관이 들어서 나중엔 아예 대놓고 안해준다고 뭐 맞겨놓은 넘들츠럼 투덜거림돠 ㅋㅋㅋ

여기와서 글 훔쳐보며 댓글 달다가는 평소 아는척 했다고 언제 또 릴레이성 덤터기를 쓸지 모르니 앞으론 묵언으로 구경만 해야게딴 결씸을 하고 감돠 ^_^


말이 씨가 된다고 이 댓글에 귀신이 씌었는지 돌고 돌아서 결국은 내게까지 바톤이 넘어오고야 말았다. ㅠ.ㅠ


2. 당신은 3년 이상 살아봐야 해

< 내 사무실 앞 대로 모습 >

나는 현재 8년째 중국땅에 살고 있으며 내가 처음 중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십여 년을 현지에서 살았다는 어떤 한국 사람이 어느 날 내게 한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은 이 땅에 3년 이상을 눌러 살아보지 않고는 중국을 안다 소리하지 마라”
당시 이 말을 들을 때만하더라도 나는 이제 막 건너온 사람으로서 중국어 한마디 할 줄도 들을 줄도 몰랐으며 그들의 문화가 어떤 것이며 그들의 기업문화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단지 혈기 왕성한 의욕과 열심히 만 하면 되겠지 하는 믿음만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뭔 소린지 귀 기우려 들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이해해 보려고도 아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매우 오만 방자하고 매우 건방진 생각이었던 것이다.
단지 의욕에 불타고 열심히 라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것을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서서히,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릴 했는지 곱씹어 보게 되더란 것이다.

한 국가를 이해하기 위한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짧은 시간에 이론과 생각만으로 이해되고 또 체득하게 되는 것이 아닌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몸으로 느끼면서 경험으로 배우고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몸과 마음으로 그 사회에 동화되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각과 생활 습관과 그들의 언어를 알아가면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처음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8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이 나라를 조금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사람 사는 사회가 다른 국가라고 해서 별다른 것이 뭐 있겠어? 나도 어느 정도 사회 경험과 기술이 있는데 열심히 하면,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것처럼 내 기술력을 가지고 성실하게만 하면 되지 않겠어?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 라는 자만심과 스스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옛날 이 땅에 먼저 와서 살았던 그 사람이 내게 했던 것과 똑 같이 “당신은 이 땅에 3년 이상을 눌러 살아보지 않고는 중국을 안다 소리하지 마라”라는 말을 다른 한국 사람들에게 내입으로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 편견이었던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본다고 했다.
옛말에 서울 가본 놈과 안 가본 놈이 싸우면 안 가본 놈이 이긴다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나라에 대해 다 아는 척 착각하거나 오만하지 말자.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직장의 업무 차 또는 개인적인 여행으로 해외 특정 국가를 아무리 자주 왕래하고 또 그 국가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며 몇 개월씩 눌러 앉아 여행을 즐긴다 해도  호텔방에 잠자고 음식점에서 밥 먹고 볼거리 들을거리 즐길거리 등만 섭렵하고 돌아오는 방법으로는 그들을 절대로 모른다는 것에 대해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그들의 내면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생활 습관이나 인습 그리고 문화까지는 절대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참으로 수박 겉할기 수준밖에 아니 된다.

1. 주변에 어린 아기가 지나갈때 또는 이웃의 아기가 있을때 너무 귀여운 나머지 우리는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는 습관이 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라 여기는 남의 머리를 절대 함부로 만지면 안된다.

2. 우리는 직장 상사로서 친근감을 표할때 직원들 머리를 슬쩍 슬쩍 건드리거나 툭툭 치는 습관이 있으며, 때로 남자들 끼리는 자주 가벼운 농담조의 야 임마, 야 이새끼야 라고 한다.

그들의 문화와 습관을 모른 상태에서 우리 습관대로 언젠가 나의 현지 직원에게 이런 몸짓을 했다가 백배 사죄하며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약속까지 했던 경험이 있다.



3. 싸게 더 싸게 품질은 최고로


< 2006년 김정일이 비밀리에 열차를 타고 중국 경제발전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다녀가면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집 근처의 오주호텔 >

1978년 중국이 경제개방 정책을 시행한 이후 수많은 외국 기업과 외국인들이 진출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덜하다고 보이는데,  대신 수많은 외국 기업들과 외국인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고 또 그들이 발생시킨 수많은 문제들도 많았던 지라 이제는 외국 기업이나 외국인은 선망의 대상 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1978 개방정책실시
1979 광동성/복건성을 대외 경제 활동지역으로 지정하고 심천/주해/하문/산토 경제특구로 결성.
1984 4월 14개 항구도시 개방 대련/진황도/천진/연태/청도/연운항/남통/상해/녕파/온주/복주/광주/담강/북해. 이로인해서 점차적으로 경제기술 개발구 성립.
1985 장강삼각주/주해삼각주/민동남지역 및 환발해지역을 경제 개방지역으로 개척.
1988 해남경제특구를 개척하고 해남을 중국 최대면적의 경제특구로 건설 하였다.
1990 상해 포동신구을 개발 및 개방 지역으로 결정하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어섰다.
1999 서부지역 대개발 전략 제시.

그러한 경험들이 많다 보니 중국 기업들 중에 외국 거래처와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 각 국가별로 좋은 바이어 순번이 메겨져 있다.
그들이 말하는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유럽 바이어, ②일본 바이어, ③북미 바이어 ④한국 바이어 ⑤대만 바이어

1. 유럽이나 일본 바이어를 제일로 친다. 왜?  가격과 품질에 대한 문제만 없다면 항상 적정 수준의 이윤을 보장해주며, 계약한 물량은 어김없이 가져간다.

2. 북미 바이어는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나 거의 정확하다.

3. 한국 바이어?  별로 인기 없다. 왜? 생산자의 이윤은 안중에도 없이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 내리 깎으면서 품질 요구는 유럽이나 일본 바이어 수준을 요구한다.

거두절미 볼것도 없이 중국은 모든 것이 싸니까 라며 막무가내로 싼 가격 그러나 품질은 최상급 보장을 요구한다.
울며겨자 먹기로 어쩔수 없이 계약을 했을지라도 애초 계약한 물량을 다 가져가지 않거나 타업체가 조금이라도 싸다 싶거나 수틀리면 의리고 뭐고 없이, 사전 언질 없이 거래선을 몰래 바꾼다.
  그러나 몰래 거래선을 바꾼게 곧 들통이 나고 만다.

4. 대만 바이어가 가장 인기 없다. 왜?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쑤시고 다니면서 중국 본토 사람들을 한 수 아래로 보면서 업신 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본토에 와서 사업을 하는 대만인들은 그들을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종업원들을 착취하듯 심하게 부려먹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다가 정치적인 대립 관계라는 특수성이 존재 한다.

오해 마시라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100%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보통의 중국 기업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 한국 TV에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예로 든다면.....많은 량의 김치가 중국에서 수입이되고 또 많은 먹거리들이 중국에서 수입이 되는데,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먹거리들이다.  그런데 중국 현지 취재 내용을 들여다 보자면, 한국 바이어들이 싼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건과 한국으로 수출하는 물건은 생산단계에서 부터 관리 체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싸게 싸게 한다고 해도 생산자가 적정 이윤이 가능할때에만 품질이 보장될 수 밖에 없는 이치인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생산자를 쥐어짜더라도 내 이윤만 추구하면 된다는 식이다 보니 절대 중국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게 씁쓸할 뿐이다.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기준이 존재 하지만 그들은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상대방이 들어서 기분 나쁜말은 절대로 면전에서 내색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진짜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 안다고 할것이 아니란 뜻이다.
살다보면 언제 어느때 어떤일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상대방이 들어서 기분 나쁠 소리를 왜 하느냐 !  이것이 그들의 진짜 속마음이란걸 알아야 한다.

중국은 우리보다 기술도 떨어지고 문화도 떨어지고 인건비 싸고 생산비 싸니까, 무조건 싸게 대신 품질은 정상 수준......이런 편견은 이제 좀 바꾸면 좋지 않을까?

싼것, 싸게만 요구하면 생산자는 자신의 이윤을 맞추기 위해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눈속임을 할 수 밖에 없다.
결론은 품질 보장 불가능이다.  
나 어렸을때 70년대 말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입학전에 알바로 김포공항에서 수출입 통관대행 업무를 했던 적이 있다.  수출입 통관 검사시 일본이나 유럽으로 수출되는 제품 검사를 할라치면, 박스 윗 부분에는 정상 제품 바닥쪽에는 불량 제품을 숨겨 포장한 경우가 허다 했다.


우리나라도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이 있었다는거 요즘 사람들 몰라도 너무 모르다 보니 중국 짱깨, 냄새나는 넘들, 별별 소리 다 한다.
경제적으로 한수 위인 어른으로서 윗사람 대접 받으려면 제 값주고 제대로된 물건에 제대로된 비즈니스 하자 그리고 좀 점잖케 굴자 그리고 페어플레이 하자.  어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것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런 것도 크게 보면 편견이요 아집이랄 수 있지 않을지?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난독증세가 있는 애국자들(??)께서는 특정 국가를 두둔한다고 할까봐 조심스럽기도 하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마져 편견을 가지고 보지 않기를 바라며 ....... !

< 봄, 가을 2차례 열리는 중국 심천 전자쇼 전시현장 >

어제 일요일 오락가락하던 장맛비(한글 맞춤법이 그렇다니 쓰긴 씁니다만 당췌 - "장마비"라 쓰던 기억이 있는데 언제부터 바뀐건지....)가 잠시 물러가고 빗물에 씻긴 공기는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고 맑은 가시거리를 보여줍니다.  도시와 산업화 진행이 가속되면서 오염된 공기로 인해 맑고 깨끗한 날을 보는게 점차 어려워집니다.
어려서 늘 보던 맑고 청명했던 하늘이 이제는 공기가 너무 많이 오염되어 이런날을 만나는게 참으로 오랜만인듯 합니다.


우리네 보통 평범한 인간사라는게, 나고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성인이되고, 군대를 다녀오고 학업을 마치고 부모품을 떠나 사회로 진출하고 결혼을 하면서 자녀가 생기고 살아가는게 바빠지면서 점차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시간은 작아저만 갑니다.  역시 자식은 품안에 있을때 자식이라고들 합니다.

새로이 한가정을 꾸리고 살다보면 자식은 이제 또 다른 자식을 위한 생활 그리고 살아가기 바쁘다는 핑게로 늙어가는 부모와는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없고, 업무에 치이고, 아이들에게 치이고, 삶에 찌들어 마음에 여유도 없이 젊은 날을 보내다 보면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이제는 살아온날 보다 살날이 더짧아져만 갑니다.

이제 어느정도 나이들고 보니 "너도 한번 살아봐라"라시던 옛 어른들 말씀이 자꾸만 생각 납니다.
모든 일들이 말로만 듣고는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나이쯤을 지나고 직접 몸으로 격고 경험을 하고나서야, 아~  그 때 그 말씀이 이런거였구나 라고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깨닫는 그 순간 때는
이미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미련한 존재 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직접 경험을 하면서 이해를 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로되신 어머니를 보면서, 이제 다시금 어렸을때 처럼 어머니의 품안에 자식으로 되돌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아버지 있을때가 더 좋았다" 라고 하십니다.
부부간의 사이는 부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자식인 내가 모르는 두분만의 정깊음이 있었던가 봅니다.
전엔 나이드신 어르신들의 했던말 또하고 했던말 또 하는 그게 귀찮게만 느껴졌었습니다. 왜 어른들은 똑 같은말을 자꾸만 반복할까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해 합니다.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오늘 다시금 듣게 될지라도, 새삼 처음 듣는냥 가만히 귀기울여 듣다가 맞장구를 쳐드립니다.  그리고 이미 어제 했던 맞장구를 되짚어 처음 인냥 또 합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서로 오손도손 말상대가 필요하고 또 들어주는 이가 있고, 그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이가 필요한 때 입니다.

오늘도 나는 어머니에게서 듣고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당신의 살아오신 얘기들을 처음 듣는냥 들으면서 머리를 주억거려 동감을 표합니다.
그렇게 또 어머니와 동행하여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서 오면서 예전에 나누지 못했던 데이트를 즐깁니다.
당신 곁에서 가만히 얘기를 들어드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당신 품으로 돌아가렵니다.

새로 개통한 9호선 동작 전철역 내부, 민자 유치로 만들어서 그런지 시설들이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눈에 띄는 2% 부족함이 있습니다.
전철에서 내려서 부터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표지판들이 많이 부족하고, 그 안내 표지판들도 이용자 측면 보다는 운영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안내를 하는 요원들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알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익수해져 있는 "나가는 곳"을 대부분 "출구"로 표기를 해놓았는가 하면 어느곳에는 "나가는 곳"이라 해 놓아서 일관성이 없고, 출구 번호마다 방향에 대한 안내표시가 거의 없습니다.


특이한 것은 급행 운행이 중간 중간 수시로 있어서 멀리 가는 사람들은 빠르고 편리합니다.  9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환승 할때는 교통카드 체크를 이중으로 두번해야 한다는게 번거롭습니다.

9호선 동작 전철역 출구 안내를 위한 위성지도 안내판 입니다.  기존 4호선 동작역과 거리가 멀어서 환승 하려면 많이 걸어야 합니다만, 9호선 동작역은 현충원 정문과 가까워서 현충원 방문시에는 편리합니다.

현충원 경내 잔듸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비둘기들 입니다.

앞서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 모습

내 아버지가 모셔진 충혼당 전경

충혼당 앞 분향소 ...... !

청명한 가을 날씨 처럼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녹음이 있는 곳

분향을 마치고 아버지를 뵙고 나와서 곁에 있는 쉼터 평상에서 싸가지고간 점심을 먹고 잠시 쉽니다.

이곳에 앉아서 짙푸른 녹음과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바람결에 지나가는 시원함을 느끼면서 오래도록 어머니와 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눕니다.

쉼터 평상에서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충혼당쪽을 바라봅니다.

쉼터 평상에 누워 가을 하늘처럼 참 맑고 깨끗한 모습과 한적함을 느껴 봅니다.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 숲속 쉼터 평상 마루에서 하늘을 응시하고 옛날을 생각합니다.

조그마한 동산 처럼 높다란 곳에 있는 묘역쯤에서 시야가 탁트인 한강을 내려다 봅니다.

멀리 가까이 맑은 공기로 인해 가시거리가 멀리까지 상쾌하게 보입니다.

남산 타워가 손에 잡힐듯 보입니다.

한강과 연해 있는 강남쪽이 가까이 보입니다.

턱아래 점점이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으로 잠든 영령들의 비석들이 보입니다.

어머니는 나무 그늘 돌 의자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

하늘에 비친 꽃 망울이 소담스럽니다.

청명한 하늘과 꽃 망울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만듭니다.

피고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 

연세들어 등이 굽어 구부정이 걷고 계시는 어머니의 뒷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흰색과 분홍이 아름다운 무궁화 꽃 그리고 작게만 보이는 내 어머니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내 어머니도 이 무궁화 처럼 화사하던 젊은 날이 있었는데.............. !

뙤약볕 아래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그늘진 곳을 찾아 땀을 닦고 쉬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 오늘 하루도 당신과 함께 걷는 이 길이 당신 덕분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외로우실때 또 내가 당신 그리울땐 우리 또 이 길을 같이 걸으며 많은 얘길 나누시지요.
아버지 얘기와 살아오신 날들에 대한 얘기 등등 그런 얘길 말이지요.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슈로 떠오른 트위터(TWitter)가 붐을 이루고 있어서 저도 하나 가입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사용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해서 하나둘 배워야 하겠네요.


일단 가입부터 해놓고 사용방법을 배우면서 하나둘 활용 해보려고 합니다.

NiCo(쏘울)의 트위터(TWitter)는 http://twitter.com/ScanMAC 입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생전에 계실땐 몰랐는데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신뒤.....자주 보고싶단 생각이 간절해진다.
가슴이 먹먹해질때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나이들어 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국립현충원 경내를 돌아 아버지를 뵙고 나무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코끝으로 느끼면서 무지개 피어오르는 분수를 보고, 전시관을 돌아 해가 뉘엇해질쯤 노량진 수산 시장을 기웃거려 싱싱한 회한점과 쐬주 한잔을 기울이고 왔다.

노량진 수산시장 어느 식당 입구에 씌여진 글귀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더라.

삶의 문제는 견디고 체험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련을 두려워 말자.      - 헤세 -


동작 전철역에 내려서 현충원으로 가는길

현충원 정문을 들어서며...................

현충문과 무명용사 탑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조카들

조카 희재

수많은 영령들

할아버지께 드릴 꽃다발을 안고.....희재

수많은 영령들과 아버지가 모셔진 충혼당

묵념(누나, 어머니)

잠시 그늘에서의 휴식

까치

비둘기

참새와 놀기

휴식의 공간

오리를 만나다

무지개 뜨는 분수

무지개

현충관
(마당 한가운데 바닦에 그려진 방향 표시를 보면 정면이 현충관이고 왼쪽이 사진전시관 오른쪽이 유품전시관이다)

사진 전시관

일제 36년의 항일 투쟁과 6.26 전쟁사에 관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1층 오른쪽에는 역대 대통령들과 간단한 시대상을 설명하는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그 다음으로 이명박 사진이 자리하고 있지만...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없다.

왜일까?

입구에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왜 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빼놓았는가?
공간이 부족해서 란다 ㅠ.ㅠ.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라...내가 보건데 공간은 충분한데 무슨 변명을 그따위로 하냐?
전두환, 노태우가 어떤 인간이냐 당신 그거 알어? 버럭 소릴 질렀다.
왜 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빼놓은 이유가 뭐냐?
아뭇소리 못하고 그냥 윗선에 건의 하겠단다. 이런 빌어벅을......!

그러고 나서 맞은편에 있는 "유품 전시관"으로 가서 입구를 들어서면서도 도저히 화가 안풀려서 또 다른 근무자에게 물어봤다.
저 앞에 보이는 사진전시관에 왜 노무현 대통령 사진만 없냐?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한다.
굳이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곧 리모델링할 예정이라 ..........
...그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 안될테니....  라며 말끝을 흐린다.
무슨놈의 변명을 그따위로 하냐?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계시던 5년과 퇴임 1년반 동안 적어도 6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너희들이 직무유기를 했다는 것밖에 더있느냐?
더구나 현직 대통령 사진을 새로 걸었다면 왜 직전의 노무현 대통령은 없는것이냐?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 근무자에게서 더 이상의 정확한 답변과 이유를 듣는다는게 무의미하게 생각되어.....그렇다면 이곳을 관할하는 부처나 담당 부서 책임자 연락처를 내놔라...라고 하여 전화번호를 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훈 선양팀 전화 02-815-0625
이 문제를 분명하게 따져볼참이다.

갑자기 생각난것 하나
그들은 뭐라고 또 변명을 할까?
생존해 있는 사람만 사진을 걸어 놓은 것이다라고 할까?
그래도 그건 안될껄?
액자 형태로 걸어놓은 사진도 아니고 벽지처럼 만들어진 즉, 인쇄되어진 벽보 형태의 연대별 표시가 되어있고 더더구나 최근 몇주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걸.
두고볼일이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유품전시관" 이다. 즉 사진전시관 맞은편 건물이다.

본 글을 퍼가거나 스크랩할 경우 반드시 출처를 명기해주시고 퍼가는 곳에 대한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 쏘울 -

늘 보는 풍경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 나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의미에서 올려둔다.

<맨 앞 낮으막히 보이는 동그란 건물이 홍콩 컨벤션 센터>

홍콩은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우리들이 사진에서 많이 봐왔던 멋진 홍콩의 야경을 촬영하는 장소가 위에 보이는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보면 좌우로 약간 높으면서 가운데로 갈수록 낮아지는 곳(산에 걸려있는 구름의 위치)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홍콩 야경을 찍는 명소이다.

<홍콩 컨벤션 센터>

<홍콩 영화 배우 스타들의 손도장을 새겨넣은 스타의 거리에 서있는 조형물>

<산등성이 가운데쪽 쏙 들어가 보이는 위치에 전망대가 보인다. 이곳이 홍콩 야경을 촬영하는 명소이다>

<피뢰침 처럼 뽀족한 건물 뒤쪽으로 홍콩 야경 사진에서 많이 보던 모습을 촬영하는 장소인 전망대가 있는 공원> 

<홍콩 뒷골목의 풍경>

<2층 전차>

<컨벤션 센터 뒷쪽>

<컨벤션 센터>

<홍콩 문화 예술 전시관>

<홍콩 인터컨티넨탈 호텔 모습>

<좌측에 홍콩 문화 예술 전시관과 우측에 인터컨티넨탈 호텔>

<컨벤션 센터 정문쪽 입구>

<검은색 기둥처럼 보이는 조형물 - 홍콩이 영국으로 부터 중국으로 반환됨을 기념하여 세운 강택민 휘호가 적혀 있는 기념탑>

<심천 TV 방송국 리포터가 홍콩에 대해 리포팅하고 있는 모습>

<컨벤션 센터 정문 앞 광장>

<우측에 보이는 배가 홍콩섬과 구룡반도(침사추이)를 이어주는 스타페리 - 수상 버스라 생각하면 된다. 홍콩섬과 구룡반도(침사추이)를 통행 하는 방법에는 바다밑으로 뚫린 터널을 차량으로 통행 하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위에 보이는 스타페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2009년 5월 8일 (음력 4월 14일)


나 태어나 51회째 맞이하는 오늘 어버이날 새삼스레이 울 아부지가 너무도 보고싶은날이다.

지난 가을 어느날 울 엄니랑 울 아부지를 만나러 가던날 하루종일 엄니랑 둘이서 국립현충원 경내를 걸으면서 아부지를 그리워했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더욱더 예전의 그 모습이 보고프다.


울 아부지가 이사가신 집을 처음 방문하던 날, 나는 아부지에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몰라 했다.

나 어릴적 즉 울아부지 젊었을적엔 왜 그리도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으셨던지 그때 나는 몰랐다~~~~~~~~~!

울아부지 마음을.....

아부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었다.


어릴적 들었던 6.25 전쟁중의 무용담을 그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울 아부지가 군대시절에 그런 일을 경험하셨겠거니 했다.

그것이 생사를 넘나드는 그런것이었는지 피부로 와닿지 않았었다.


울 아부지 나이들고 늙어가면서 잔정이 늘어가실때쯤엔 난 먹고사느라 그 잔정을 그리고 애잔한 자식 사랑하는 당신에 마음을 다 헤아려 드릴 여우가 없었다.

단지 바쁘다는 핑게로.....지금 나는 많이 후회를 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가까운 타국 살이에 울 아부지가 하늘나라로 이사가던 날도 나는 곁에 있어 드리지 못했다.


당신은 큰 아들을 많이 찾으셨다는데도 말이다.


오늘 2009년 5월 8일 어버이날 그리고 우연하게 겹쳐진(양력과 음력 날짜 차이로) 이사가신날 기일을 맞아 어찌 이다지도 보고픈지, 이제야 뼈져리게 아픔으로 와닿는다.


지난해 가을 어느날 처음으로 울 엄니랑 함께 국립현충원으로 아부지를 만나러 가던 그날 그 모습을 여기에 올려본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 정문>


<울 아부지네 집으로 가는길목에 영면해 계신 영령들>


<울 아부지네 집 이름은 충혼당>


<울 아부지네 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작동 산기슭의 많은 분들>


<걷고 또 걸어서 울 아부지네 집 앞에 도착>


<여보~!  나 왔수....!   여기 당신 큰 아들도 같이 왔다우.  울 아부지가 쉬시는 방 그리고 전우들>


<그 동안 잘 지내셨수?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당신 곁으로 올때까지 외롭더라도 잘 지내기 바래요.>

울 엄니도 사후엔 저곳 아부지 곁에 모셔질 예정


<울 아부지네 집 충혼당 내부>


<울 엄니 헌화를 위해 제단 앞으로.......>


<울 아부지네 집은 새로 지어진 아주 멋진 경견한 환경이더라>


<아부지~~!   집이 너무 멋지고 깨끗하고 조용해서 무지 좋지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부지 오늘이 어버이날이면서 아부지 이사가신 날이잖아유~!   저녁에 저랑 술한잔 하실래유?

저는 아부지 많이 보고싶은데, 아부지도 글쥬?


아부지~!  그거 몰르지유?

아부지가 즐겨 부르던 18번지 노래가 저의 18번지가 되었단걸.....

가끔 노래 부를 자리가 생기면 꼭 이노랠 부르는데 그럴때마다 지가유 꼭 아부지 생각해유~~!

저 아주 아주 어릴때 비내리던 어느 여름날 작은방 방문을 열어놓고 마당을 내다 보면서

아부지가 이노래 불렀잖아유....

오늘 저랑 술한잔 하면서 같이 함 불러보실래유???



비내리는 호남선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못올 그날자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원수와 같더란다



울고 넘는 박달재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집을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산골 나를두고 가는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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