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던 어느 일요일 바닷가에 갔다가, 해수욕엔 관심 없고 모래 사장에서 만난 작은 게랑만 놀다가 왔다.


언제 또 올건데?  라며 두눈을 쫑긋 세우고 쳐다본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 되고 싶다”던 키작은 친구


출처 : 한겨레  바로가기    최상원 기자

» 1989년 여름 부산상고 동기생 가족들과 울진 불영계곡으로 피서갔을 때 물놀이를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노 전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봐 피곤할 정도였다고 원창희 회장은 회고했다.


‘단짝’ 원창희 회장이 회고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에게 고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부분 주저없이 원창희(63) 오앤엔통상㈜ 회장을 꼽는다. 16일 원 회장의 부산 사무실을 찾아가 그에게서 ‘친구 노무현’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들려준 원 회장의 회고담을 가능한 그대로 소개한다. 부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상고 취업반 졸업 뒤 취직…“왜 월급 차이 납니까” 항의 뒤 사표

1963년 부산상고에 입학해서 내 친구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어요. 그 사람은 키가 작아서 제일 앞줄에 앉았죠. 같은 반도 아닌데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놀러왔어요. 표정이 참 밝았죠. 명랑하고 농담도 잘하고.

2학년이 되면서 노무현 그 친구는 취업반으로 진학하고, 나는 진학반으로 갔어요. 졸업하고는 잠시 헤어졌죠.

친구는 부산에 있는 삼해어망이라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월급을 받으니까 대졸 신입사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하루는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해서 따졌대요. “다 같은 일을 했는데 왜 월급이 차이가 납니까”라고. 사장이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직장을 그만둬 버렸어요. 6개월만에요.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

그리고는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울산으로 가서 막노동을 했어요. 당시 울산에는 온통 공사판이었으니까. 영남비료 공장을 짓는 데서 일을 했는데,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공사장에서 떨어져 다쳤다고. 병원에 쫓아갔더니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서 제대로 말도 못해요. 글을 써서 말을 하더군요. “부산 중부산세무서에 근무하는 큰형님(노영현·사망)에게 연락해서 이불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퇴원하고 나서 울산 시장통에서 술을 마시며 “고시에 붙을 때까지는 절대 안나올 끼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고향으로 갔어요. 노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한 것은 큰형님 영향이 컸어요.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세무공무원이 됐거든요. 노 대통령이 공부할 때도 형님이 봤던 책으로 했어요.


10명서 20만원씩 모아 요트 만들었더니 ‘호화요트’로 둔갑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친한 친구 네명이서 부부동반으로 다달이 계모임을 했어요. 하루는 친구가 모임에서 요트 이야기를 꺼내더라구요. “200만원만 주면 부산 구포에서 에프알피(FRP·유리섬유보강플라스틱) 요트를 만들어 주는데, 1인당 20만원씩 10명이 모아서 요트를 한대 만들자”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아 요트 2대를 만들었어요. 일요일이면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요트를 탔죠. 당시 한국해양대, 부산수산대 등 대학에도 요트 동아리들이 있었는데, 정작 학생들은 요트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생들과 함께 요트를 탔어요. 그러면 학생들은 김밥이나 막걸리를 준비해오고. 그런데 이게 나중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호화요트로 둔갑을 했더라구요.

그 당시 노 대통령은 일본을 왔다갔다 하더니 일본 요트강사 자격증을 따왔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요트강사 자격증을 땄다”라며 자랑하고 다녔죠.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요트용품 제조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날리기도 했어요.

1980년 쯤이었을 거예요. 하루는 권양숙 여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요즘 건호 아빠가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집에 형사들도 찾아오고, 정보기관에서도 찾아오고. 한번 알아봐주세요.”


민주화 운동 ‘시기상조’ 충고하자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그래서 친구를 광안리해수욕장 횟집에서 만나 물어봤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푹 빠져들어 열심히 하고 있더군요. 당시 제조업을 하고 있던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나는 열심히 설득을 했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그런 것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등등. 몇시간을 이야기하고 횟집에서 나왔는데, 헤어지면서 그러더군요. “우리 각자 인생 앞으로 가자.” 서로의 인생살이가 다르니, 각자 자신의 길을 가자는 말이었죠.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이 이미 선 사람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결국 1987년 구속도 되고 변호사 자격도 정지됐죠. 하루는 밤에 전화를 해서 “친구야,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 너그 회사에 취직 좀 시켜도. 먹고 살게”라며 한숨을 쉬더군요.


생각은 DJ에 공감…정치입문은 YS밑에서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변호사 자격도 정지되고 할 일도 없는데, 니가 추구하는 것을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하면 어떻겠노”라고 권했어요. 그렇게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죠. 그런데 친구는 “디제이(김대중)와 와이에스(김영삼)를 비교해 볼 때 디제이 생각에 훨씬 공감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내가 말렸죠. 부산에서 정치에 입문하려면 무조건 와이에스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디제이와 와이에스 양쪽에서 모두 친구를 영입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와이에스의 도움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어디에서 출마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와이에스에게 부산 아무 데나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곤 부산 동구로 자원해서 갔죠. 부산 최고의 강자인 허삼수가 버티고 있었는데. “군사 독재정권의 최고 실세와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는 논리를 폈죠.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조직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죠. 당시 내가 부산상고 53회 동기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졸업 20주년 기념행사를 한 직후라 동기생들의 연락처를 많이 갖고 있었죠. 그래서 동기생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소주 한병을 사더라도 동구 산복도로 구멍가게에 가서 사면서 노무현에게 한표를 찍어달라 부탁하라고. 정말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해서 노무현 의원이 탄생했어요.

»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는 1994년 여름 열흘 동안 원창희 회장 등 친구 부부들과 함께 캐나다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이외 첫 외국여행이었으며, 이때 골프도 처음 해봤다. 양 옆으로 노 전 대통령 부부, 가운데 원 회장 부부가 서있다.


청문회 스타 된 뒤 의원직 사퇴서…최형우·김동영 등 만류로 번복서

그리고는 청문회 스타가 됐죠. 주위에 친구들이 “너 이제 대통령해도 되겠더라. 국회의원 중에 니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더라”며 부추겼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척 힘들어했어요. 전국 곳곳에서 밤낮으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노무현 정도라면 무엇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유명하기만 할뿐 초선 국회의원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심한 무력감에 빠져 정말 힘들어했어요. “국회의원 그만두고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훨씬 보탬이 되겠다”는 말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경남 거제도의 무인도로 친구를 데려가서 텐트를 치고 이틀 동안 쉬다 왔어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런데 돌아와서는 국회의원 사퇴서를 내고 잠적 해버렸어요. 권여사는 말할 것도 없고, 와이에스까지 전화를 해서 친구를 찾아달라고 하더군요. 일주일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틀 뒤 새벽에 권 여사가 전화를 해서 “새벽에 건호 아빠가 돌아와서 지금 자고 있는데, 좀 와주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해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갔어요. 우연히 그 비행기에 문재인 변호사도 탔어요. 목적지가 같더군요. 친구 집에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까 민주당 의원 12명이 찾아왔어요. 최형우, 김동영 의원 등이 있었죠. 서명만 하면 되는 사퇴 번복서도 만들어 왔더군요. 의원들이 친구에서 설득을 하는데, 그때 친구의 어머니와 장모가 함께 부엌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설겆이를 하고 있었어요. 마음이 참 안됐더라구요. 내가 담배나 한대 피우자면서 친구를 밖으로 불러 냈어요. 사표를 내면서 어머니에게 뭐라고 했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자식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둔다는데 말릴 부모는 없겠지만, 앞으로 너그 어머니하고 장모는 오래 못살거다. 니가 이러는 것을 보면서 어찌 오래 살겠노. 친구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때 최형우 의원이 쫓아나와 “친구 이야기가 백번 맞다”며 우격다짐으로 번복서에 사인을 받아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당시 원내총무이던 최형우 의원이 친구에게 갑자기 큰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번복서를 쫙쫙 찢어버려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노 의원. 어차피 사인한 것, 내가 불러줄테니 자필로 번복서를 써주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필로 번복서를 썼고, 최형우 의원은 그것을 들고 돌아갔어요. 김동영 의원은 밥을 사겠다며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갔어요. 김동영 의원이 식당에서 하는 말이 “야당 오래하면 친구들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고, 결국 가까운 친구들의 껍데기까지 벗기게 된다”며 정치인생의 회한을 털어 놓더군요.


부산시장 출마전 캐나다 여행…환경보호 눈떠

1992년도에 부산 동구에서 다시 출마했는데, 떨어졌어요. 언론에서 호화요트 기사를 낸 것이 이때였죠. 빈민가 밀집지역에서 분위기가 확 돌아섰지요. 19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 또 떨어졌어요.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부인 앞에서 각서까지 썼다더군요.

부산시장 선거에 나가기 전인 1994년 여름 내가 제안을 해서 친한 친구들끼리 부부동반으로 10명이 열흘 동안 캐나다에 여행을 갔어요. 예전에 함께 계모임을 하던 친구가 캐나다 캘거리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거든요. 노 대통령은 일본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죠. 이때 친구가 환경보호에 눈을 떴어요. “이렇게 큰 나라도 자연을 보호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조그만 우리나라는 정말 열심히 자연을 지켜야 하겠다. 야생동물을 지키는 것도 그렇고, 여기가 정말 모범사례다”하면서 쉴 새 없이 환경보호를 강조했어요.

골프장도 이때 처음 갔어요. 해양수산부장관이 되고 나서 처음 골프를 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전에 캐나다에서 한번 골프를 쳤죠. 이때까지 노 대통령은 골프에 대한 거부감, 나쁜 시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캐나다의 골프장을 가보고는 자연환경을 유지하면서도 골프장을 만들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죠. 권여사도 “우리도 귀국하면 골프를 배워요”라고 친구에게 권했죠. 실제로 권여사는 귀국해서 골프를 배웠는데, 친구는 바빠서 배우지 못하다, 해수부장관이 된 뒤에 배웠죠. 장관이 된 직후에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야 머리 좀 올려도”하더군요. 정식으로 골프에 입문하겠다는 것인데, 당시 내가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창원에 있는 동기생인 강태룡 회장에게 연락해 대신 머리를 올려주게 했지요.

2001년 들어 하루는 그래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말렸죠. 안된다고. 그런데 경선을 거쳐서 하기 때문에 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대통령 후보는 될 수도 있겠다며 웃고 말았죠. 그런데 진짜로 출마 선언을 했어요. 결국 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도왔어요. 동문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요. 모두가 열성적으로 했어요.

내가 또 물었어요.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냐고. 그런데 이렇게 답을 해요.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 되고 싶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 경호원 한두명만 데리고 대학로에 가서 포장마차 아무 데나 들어가서 닭똥집에 소주를 마시는 대통령. 옆자리 손님과 편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누는 대통령.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국민들은 그런 권위 없는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권위를 확 낮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당선되고 나서도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해요.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는 전화라도 해라고 시켜도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했죠. 결국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고등학교 한해 후배 최도술씨에게 시켜서 감사편지를 사람들에게 보내게 했어요. 그제서야 사람들 마음이 많이 녹았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가식으로 생각하더군요. “고마움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에요. 정치인은 그러면 안되는데 아쉽더군요. 그 바람에 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라 애를 먹었죠.

그런데 대통령에 취임한 뒤 동기생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일이 있었어요. 한사람 한사람과 옛날에 함께 겪었던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다른 친구가 쓴 연애편지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신기할 정도였죠.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서로 통하는 신뢰,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언론권력의 폐해 누가 막겠느냐”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산에 처음 왔을 때 롯데호텔 객실에서 1시간 동안 만났어요. “청와대 들어가면 우리는 영영 못만나는 것 아이가? 앞으로 우찌 연락하모 되노?”하고 물으니까 “내 수행비서한테 전화해라. 내가 24시간 안에 니한테 전화하모 되는 것 아이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약속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어요. 내가 전화를 걸면, 몇시간 뒤라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고?”하고 물어요.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 잠깐 하고, 힘내라 하고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도 반드시 전화를 걸어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웠어요.

친구는 남에 대해 폄하나 나쁜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가능한 남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했죠. 누가 다른 사람의 단점을 이야기 하면 “아니다. 장점이 더 많다”고 했죠. 그러면 말한 사람이 머슥해져요. 언론에서는 말을 함부로 상스럽게 한다고 비판했지만, 본인은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게 쉽게 말하는 것을 즐겼죠. 한마디를 해도 가슴에 와닿는 말, 평범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한 것이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말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이 말렸어요. 언론과도 잘 지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언론권력의 폐해를 누가 막겠느냐. 내보고 대통령 하지 말라는 말이냐”며 본인의 소신을 꺾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방언론도 활성화시키고, 다양한 언로를 만들려고 했죠.

퇴임하기 1년 전쯤에 내가 물었어요. 집도 없는데 다음에 어디에서 살 거냐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더군요. 내가 그랬어요. 부산에 내려와라. 살아보니까 부산이 제일 살기 좋더라. 지역균형발전을 부르짖은 대통령이니까 부산으로 내려와서 살면 좋지 않느냐. 옛날에는 선비가 벼슬에게 물러나면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고 고향을 지키고 그러지 않았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야, 니 말이 맞다. 부산에 집을 한번 알아봐도” 하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봉하마을로 결정했죠.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 검찰 수사가 진행될 때는 매일 찾아가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친구가 전화로 그래요. “기자들이 많으니까 찾아오면 괜히 얼굴 꺼실린다. 오지마라.”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한번 보고싶다고 연락이 와서 생선회를 준비해서 부부가 함께 봉하마을로 갔어요. 두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했죠. 일부러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힘이 없어 보였어요. 허리가 아파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더군요. 중간중간에 일어나서 잠시 몸을 풀고 다시 앉곤 했어요.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이제 갈란다” 했더니 “그래 가라. 나도 글 써야 한다”고 했어요. 권여사가 “내가 이 양반 힘들게 만들어 미안해요”라고 하더군요. 친구는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았다고 언론에 보도된 1억원짜리 시계에 대해 “나는 그 시계 구경도 못했다”하면서 “내가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했다” 하더군요. 친구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거짓말을 못해요. 그 친구가 몰랐다면 진짜 몰랐던 거예요. 돈 받은 사실을 말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까 권여사가 말을 못한 것이죠. 시중에서는 부부간에 모를 리가 있나라고 하지만, 그게 상식이지만, 이 부부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도 찾아가서 만났어요. “정치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 주변 친구들 주머니나 털고”라며, 나를 가리키며 측근들에게 “저기 골병 든 친구 하나 있네”라고 하더군요. 옛날에 김동영 의원이 했던 말인데, 그 말을 결국 친구가 하게 되더군요.

정치인에게 후원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줄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정치에 전념하라는 것 아닙니까? 언론에서 줄곧 박연차씨와 강금원씨를 노 대통령의 후원자라고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와서 왜 이럽니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2009년 4월 23일 동창모임 카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아마도 국민학교 4학년때 였지 싶은데,

오후 수업시간에 키가크고 광대뼈가 살짝 나온 멋쟁이 송석희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노래 잘하는 사람을 뽑는단다.

나름 이미 알려진 꽤꼬리 목소리를 가진 친구들을 호명할때, 난 당연히 해당없음을 잘 알기에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찰라 귓전으로 들리는 내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바라보노라니 분명 내 이름을 호명하고 있잖은가.

순간, 이건 아닌데 난 어디에서도 남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불러본적도 없고 통신표 음악 과목에 "수"를 받아본적도 없는데, 왜(Why?) 나를 호명 하는 걸까?????

에이~! 저 노츠녀 여선생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게지~!


아무튼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살미국민학교 합창단원이 구성되었던것이었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얘기에 의하면.....빨간색 반바지와 하얀색 상의 그리고 빨간색 모자와 쬐끄만 넥타이 유니폼을 입으면 촌놈들인 친구들이 놀려 댈까봐 누구도 선듯 나서서 저요 저요 저 합창단 시켜주세요...하는 년놈들이 없다 보니 선생님의 직권으로 할만한 남여 학생들을 추렸던 것이었고, 그중에 나는 볼것도 없이 내 누이의 영향으로 저놈은 지네 누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당시 이호일 선생님이 미술 특활반을 지도하고 있었음)

보나마나 노래좀 하지 않을까 라는 이상한 논리로 낙점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달간 나머지 공부하듯 방과후 남아서 합창 연습을 하고, 드디어 충주에서 합창대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전 청평모임때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장병선이도 이때 멤버였다고 했던가?(난 잊고 있었음)

나름대로 열과 성의를 다해 연습하고 출전을 했는데, 산골 촌놈들이다 보니 충주 시내 구경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 충주 시내가 어찌 그리 으리으리하던지 감개가 무량(??) 긴장(??) 초조, 두리번 두리번, 얼굴들은 햇볕에 그을어 까무잡잡하고 촌티가 줄줄 나는 모양새들이라니....

하지만 충주교현국민학교 강당에 모인 다수의 충주시내 학교 경쟁상대들은 얼굴색이 뽀얕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귀티(??)나는 자태, 더하여 이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 ㅎㅎㅎ 에고 비교된다 비교돼~!


긴장에 긴장을 더하여 우리차례에서 합창을 마치고 혹시나 등수안에 들까 싶었지만 혹시가 역시가 되었지만 멀리 시골에서들 왔다고 등외로 위로의(??) 상품을 받았던가 아무튼 그랬다.


이제 그당시에 합창단 멤버였던 친구들 손좀 들어봐라........!


아마도 장변선, 민광기.....다른 친구들 자수좀 해보시게나들


요 며칠 바빠서 잠도 부족하고, 오전에는 거래처 순회, 잠시전에 돌아와 커피한잔 마시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합창단의 기억을 끄집어 내본다네.

내가 서울 살이를 시작 하게된 것은 고등학교를 충주에서 마치고 곧바로 상경을 했던 1978년인지 1979년 초인지싶은데, 그 당시 내가 몇년동안 다니던 회사가 북창동(남대문 시장 길 건너편, 한국은행 뒷편)에 있었는데 한달에 몇번씩 하는 회식때면 한길건너 남대문시장 골목에 있던 닭곰탕을 먹으러 잘 다녔다.


그때의 그집이 아래 기사에 나오는 "강원집"이다.

한국에 가면 반드시 그 강원집 닭곰탕을 먹고말테야 하고 벼르고 별렀건만 아직 못가봤다.

아래 사진의 쭈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닭곰탕 그리고 양념장이 얹어진 모양세는 벌써 몇십년이 흘렀건만 변함이 없다.


더하여 변함없는 그때 그맛을 느낄수 있다라는 기사 내용을 보자니, 몇십년 전에 즐겨 먹던 그맛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입안에 침이 가득고이누나......!

당장 달려가서 한냄비 그리고 쐬주한잔 캭~~~~


남대문시장 강원집 닭곰탕 번개 안하나???? ㅋㅋㅋ


아래 기사는 우연히 모 사이트에서 기사를 읽다가 옛생각이 나서 퍼온글임.


서울에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있어?

남대문 갈치골목 강원집 닭곰탕
09.04.03 11:34 ㅣ최종 업데이트 09.04.03 11:3  이덕은 (hanok98)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추억의 도시락 같은 거.

 

지난 번 남대문 갈치골목을 지나다 우연히 닭곰탕집을 하나 보았는데 유리창 너머로 보니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찢은 닭고기를 넣어 놓은 것이 그 옛날 버드나무집을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에는 시청 근방을 ‘멕여살릴’ 정도 규모의 남대문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 번화가가 되어버린 숭례문 부근 빌딩가.
ⓒ 이덕은
닭곰탕

 

혹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고 검색창에서 버드나무집을 찾으니 온통 강 아래 고깃집만 나온다. 내가 찾으려는 건 주머니 생각하지 않고도 즐겨 먹을 수 있던 닭곰탕집인데도 말이다. 버드나무집은 온 나라 자동차 댓수가 백 만 대 아니 수 십 만 대도 되지 않았을 무렵 우리 귀에 낯선 기사식당이란 단어를 만들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갈치골목. 그래도 근방에 이렇게 서민이 숨쉴 공간이 남아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낮에는 갈치골목에서 줄서는 일은 다반사이다.
ⓒ 이덕은
남대문시장

 

내가 살던 집 골목에서 나오면 바로 버드나무집이 있었는데 항상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지금에야 식당에 식재료를 공급해주는 업체가 따로 있어 거의 비슷한 김치나 깍두기를 이집 가도 먹을 수 있고 저집 가서도 먹을 수 있지만, 식간을 이용해서 배추와 무를 길거리에 쌓아놓고 다듬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구경거리였다.

 

아줌마들이 아기 목욕통으로 쓸 만한 커다란 함지를 두세 개 갖다놓고 차고 앉아 커다란 연필 깎듯이 배추를 부엌칼로 툭툭 치면 10센티 전후로 제멋대로 잘린 배추조각이 쌓인다. 그 위에 고춧가루, 마늘, 파, 소금, 미원를 뿌리고 벌겋게 버무리는데 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몇 입 나누어 먹어야 될 정도의 크기로 썩썩 잘랐다.

 

요즘에야 설렁탕집에서 가끔 보는 그런 커다란 깍두기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커다란 깍두기와 배추김치는 거기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원을 넣었는데 그게 무슨 음식이냐고 탓하지 말라. 그 때는 배웠다는 주부들도 거의 모든 음식에 미원을 쳤으니까. 

 

  
그 골목을 지나며 낯익은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쭈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긴 닭고기.
ⓒ 이덕은
강원집

 

닭고기 기름 많은 것 아시지. 지금에야 '껍질 빼고 기름 빼고'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 양은 냄비에 주욱죽 찢어놓은 닭고기와 육수를 붓고 밥 넣고 다대기 한 숟갈 넣고 펄펄 끓여 파 송송 썰은 것 얹고 커다란 깍두기와 국물 넉넉한 배추김치와 마늘을 곁들여 나오면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드-은해지는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 이덕은
강운집

 

그런데 그런 양은 냄비와 닭을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제대로 먹으려면 닭곰탕을 시켜야겠지만 동행이 있으니 닭곰탕만으로는 안주가 되지 않는다. 문간 옆 조리대에서는 방금 삶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닭을 커다란 쟁반 위에 놓고 손으로 뜯어 접시에 담고 있는데 닭 한 마리 시키니 양은냄비에 곰탕국물을 곁들여 준다. 닭국물이 달긴 하지만 미원을 약간 가미한 것 같은 맛과 질긴듯하면서도 졸깃한 닭고기 씹는 맛이 옛 맛과 비슷하다. 국물이 식으면 자동적으로 육수를 첨가해서 다시 끓여주니 맘이 흐뭇하다.

 

  
점심시간에 점잖게 혼자서 한 상 차지하고 먹고 싶다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 이덕은
닭곰탕

 

요새야 닭 조리법이 다양해졌지만 튀길 기름조차 귀하던 때에는 그저 푹 삶아 국물도 내고 백숙으로 고기도 뜯어 먹는 것이 제일 간편한 조리법이었을 것이다. 푹 고은 닭을 건져 찬물에 손가락을 식혀가며 다리 비틀어 내어 어른들 몫으로 따로 남겨두고, 닭 날개 뜯어서 '바람 필까봐' 남정네 못 먹게 감추어 두고, 수탉 잡으면 '벼슬하라고' 닭 벼슬은 아들에게 따로 떼어주고, 가슴살은 발라서 국거리로 남겨두고, 뱃속의 미숙란과 똥집은 내가 먹고, 국물에는 대파를 송송 썰어 얹어 내었으니 이만큼 추억과 정감이 배어있는 음식을 보기 쉽지 않으리라.

 

  
닭곰탕. 점심시간만 아니라면 마늘 한 조각 고추장에 찍어가며 먹을텐데...
ⓒ 이덕은
달곰탕

 

국밥이라는 것이 체면 차리고 먹는 음식이 아니다. 할 일도 많은데 장소 구애받지 않고 솥 걸어놓고 끓여 사발에 국 푸고 밥 집어넣어 깍두기 하나 놓고 먹는 음식이니 애시당초 점잖게 격식 차리고 먹을 거면 들여다보지도 말아야할 음식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곱창이나 꼼장어처럼 신분 상승된 음식이 하도 많아 아직도 제 분수를 알고 있는 이런 음식을 보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진다.

 

  
약간 질기면서 쫀득한 식감. 무슨 고기인지는 짐작 가지만 질을 따진다면 국밥 자실 자격이 없다.
ⓒ 이덕은
닭곰탕

♣ 슈레이티 비티 압둘라

누구나 첫사랑이라는 기억으로 떠올려 지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가슴앓이 같은 모습이 아닐런지.......!
꿈속에서 만났던 아름다움 처럼 기억속에만 존재하지만 평생 떠올릴 수 있는 잠재 의식 속의 그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에게 굳이 너의 첫사랑은 어떤 색깔이었더냐 라고 물어본다면, 지금까지 단한번 만나지도 못했고, 단한번의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고, 단한번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기회 조차 없었던 "슈레이티 비티 압둘라"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머나먼 타국 사람이 그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컴퓨터 통신이 발달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던 그런시절이 아니고 오로지 손으로 쓴 손글씨에 테두리가 빨강파랑으로 둘러쳐진 국제 우편으로만 존재하던 그러한 추억은......

고교 1학년때 우연히 모 해외펜팔 소개소에서 소개받은 사람이 말레이지아 소녀였는데 나이가 동갑내기였다.
당시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를 꿰어맞춰 개발새발(??) 되지도 않는 문장으로 보내는 내 편지에 매우 성실히 답장을 보내오는 그녀였다.
나이 50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외국인 포함)의 영문 필적을 봐왔지만 아직까지도 그녀처럼 예쁜 손글씨를 쓰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원래가 한글 쓰기 조차도 소문난 악필인 내가 그녀의 필적에  대적할만한 솜씨로 쓸 자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당시 내딴에는 이쁜 글씨를 쓰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생각이 난다.

그러던 어느날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사진을 받아들고 무척이나 신기해 했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그리고 또 군대가서 까지도 몇번의 편지가 이어졌는데  어느날인가의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을 했고 남편은 여행사 직원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후로 군대를 제대하고 한두번 오가던 편지가 끊겨 더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늘 자신을 자기가 좋아하는 "Sue"라는 애칭으로 불러 달라던 그녀였고 동남아시아인 특유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인형처럼 아름답던 모습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말레이지아의 페낭 이포라는 주소만 기억하고 있을뿐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알수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라 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빈번하게 해외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유독 말레이지아엔 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혹여 언젠가 말레이지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찾아보리라 했지만 아직까지도 기회가 없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편지속에만 존재하던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의 친구들 처럼 늙은 모습일까 만나보고 싶다...얼마나 변했을지 나는 지금도 그녀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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