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에 올라온 기사에 일본인에 의해 제작된 TV프로그램 영상으로, 숙연한 마음과 함께 눈물이 난다.
일본인마저 울린 45분짜리 '안중근' 영상
안중근의 미완성 걸작 '동양평화론'은 충돌을 원치 않는다. 안중근, 그는 어디까지나 중국과 조선과 일본의 운명공동체를 꿈꿨던 이상론자이면서 또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공부가 부족하다. 한국에서는 그를 침략주의 야욕에 불타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민족의 영웅으로만, 일본에서는 초대 총리대신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로만 받아들인다.
둘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컸다. 때문에 외부에, 이를 테면 일본 매스컴에 추도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충돌은 쉽사리 짐작됐다.
아
마도 2월 중순이었을 게다.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아래 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의 "안중근 장군 추도식을 도쿄에서
열자"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 사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즈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정기국회에서
"안중근은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을 살해해 사형을 받은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말만 들어가
있지 않을 뿐, 저 표현에는 안중근에 대한 아베의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그 어느 때보다 걱정되는
지금, 안중근 추도식을 도쿄 한복판에서 연다는 것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걸 전제로 한 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때 정 대표가 한 말은 무척 흥미로웠다.
"
그러니까 여는 것이다. 안중근 정신은 일본인들까지 감화 시킬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꿈꾼 성인이다.
지금 한국·중국·일본의 상황을 봐라. 지금이야말로 안중근 정신을 되새겨 한중일 삼국이 주도하는 동양평화를 논해야 할 시기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45분짜리 동영상을 소개했다. 그 동영상은 1995년 7월 일본 공중파에서 방영된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이었다. 이 방송을 본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사람과의 만남도,일과의 만남도,소유물과의 만남도,깨달음과의 만남도,유형 무형의 일체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정확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꼭 만나야 할 바로 그 때가 있는 법.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천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있고, 아무리 만나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 밖에 없다.
모든 마주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인연의 흐름을 거스르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다.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아직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을 뿐. 만나야 할 일도, 만나야 할 깨달음도 인연이 성숙되면 만나게 된다.
열심히 일 하고 공부했는데,분명 능력은 다 갖추고 있는데 아직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고? 무엇 하나 그리 부족한 것도 없는데 제 짝을 찾지 못했다고? 열심히 참선하고 정진했는데 깨달음은 찾아 올 생각을 안 한다고?
아직 시절 인연을 만나지 못한 탓이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다 올라왔는지, 중간 만치도 못 올라왔는지 아직 시작도 못 했는지 상대편에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그 사람은 꾸준히 계단을 오르고 있고, 언젠가는 계단 위의 사람들에게 불쑥 얼굴을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시절 인연은 겉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안으로 안으로 전체적인 질서에 의해 여무는 것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고, 만나길 원해도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아직은 차분한 마음으로 더 기다려야 할 때다. 안으로 인연의 씨앗이 잘 싹 틀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할 때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너무 보고 싶어 안달하지도 말라.성급하게 생각지 말라.
시절 인연이 되어 만남을 이룰 때, 그 때 더 성숙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다만 자신을 가꾸라. 사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인연은 내 밖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만남은 내 안의 나와의 마주침이다.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도 그 사람과의 만남은 내 안의 바로 그 싫은 부분을 만나는 것이며,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도 내 안의 이기의 일부분이 상대로써 투영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은 내 안의 놓치고 있던 나를 만나는 숭고한 '나를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가지지만 그 만남을 아무 일도 아닌 양 그저 쉽게 소홀히 흘려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그 모든 사람은, 설사 그것이 아주 잠깐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진지하고도 분명한 우주적인 메시지를 담고 온다. 다만 우리가 그 만남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것일 뿐.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삶의 성숙과 진화를 가져온다. 다만 그 만남에 담긴 의미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는 인연일 뿐이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있고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 모든 만남은 영적인 성숙의 과정이요 나아가 내 안의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직 존재의 본질에 어두워 만남 속에 담긴 의미를 찾지 못할지라도 그 만남을 온 존재로써 소중히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이나 펼쳐지는 '만남'의 진리를 진리로써 온전히 받아들이고 소중히 가꾸어 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부처요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적이든, 내 편이든, 이익을 주는 사람이든, 손해를 주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이 내게 진리의 메시지를 전해 주기 위해 이 법계에서 보낸 부처요 관세음의 화신인 것이다.
결코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그 어떤 만남도 내게 어떤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음을 알라. 이를테면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내 과거의 탁한 업을 녹여주기 위한, 또 내 안의 미움을 생생하게 비춰주기 위한 법계의 배려로써 내 앞에 나타난 인연일 수 있다.
그러니 모든 종류의 만남은 다 좋은 것이다. 좋고 싫은 것 가운데 좋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좋음이 아닌 좋고 싫음이 없는 전적인 좋은 그런 것이다. 당장에는 나쁜 만남인 것 같아도 전체적인 관점, 전 우주적인 관점, 내 전 생애에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만남은 내게 좋은 만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만남을 맑고 향기롭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내면이 성숙하면 만남도 성숙하지만 내 내면이 미숙하면 만남도 미숙할 수 밖에 없다. 미숙한 사람에게 만남은 울림이 없고 향기가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빛을 보면 시절 인연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온 우주와 만날 수 있다. 그 누구와도 이미 청정한 만남은 이루어 진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일과 직업이, 바로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소유물들과의 만남이 바로 지금 내 주위에서 매일같이 부딪치는 사람이며 친지, 친구, 가족들이 그렇게 내가 꿈에도 그리며 찾아 해매던 ‘바로 그 사람’이요, ‘바로 그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모든 만남은 붓다의 선물이요 신의 사랑이다. 아니 우린 항상 부처를 만나며 신과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 만남의 눈을 뜨고 내 주위를 살펴보자.
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영어: Steven Paul "Steve"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으로, 애플의 창립자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했다. 또한, GUI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5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을 혁신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게 이끌었다.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하여 음악 산업 전체를 뒤바꾸어 놓았다.
또한, 2007년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바꾸어 놓았고 2010년 아이패드를 출시함으로써 포스트PC 시대를 열었다.
스티브 잡스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최근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자 디즈니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한편 그는 2004년 무렵부터 췌장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로 인하여 2011년 8월 24일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잡스는 CEO직에서 물러나지만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키로 했으나,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사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1년 10월 5일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北京遇上西雅图(북경에서 시애틀을 만나다 Finding Mr.Right, Anchoring in Seattle)
감독 : 쉐샤오루(薛曉路) 개봉일 : 2013년 3월 21일 (중국) 출연 : 탕웨이(湯唯), 우슈보(吳秀波), 하이칭(海清)
문가가(탕웨이 분)는 재벌 사업가의 세컨드로, 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합법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출산허가증(准生證)을 발급받지 못해 미국으로 가서 원정출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을 좋아하던 그녀는 큰 고민없이 출산지를 시애틀로 정한다. 그 곳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Frank(오슈보 분) 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는 러브스토리.
산뽀니아는 대나무로 만든 팬파이프의 일종으로 남미 안데스의 전통악기이며 잉카제국 이전부터 있었던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악기로써 현재에 이르러서는 께나와 나란히 민속 음악의 본고장인 안데스(andes)지역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악기이다. 음색은 산의 메아리나 지나가는 바람 소리같은 애수를 띠고 있으며, 인디오 언어로는 시쿠리(Sikuri)라고도 한다.
안데스 음악은 잉카 문명이 발생한 곳인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한 "에콰도르","볼리비아"."페루","칠레","북아르헨티나"지역의 음악을 일컷는다.
강산이 세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건만 내게있어 지금까지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로 기억이 되는 그것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Les Uns Et Les Autres 1981)
180분이라는 긴 시간때문이었지 싶은데, 당시 TV로 방영이 되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 방영을 했었고, 그 몇년후에 재방영을 했었다는데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늘 오래전 기억으로 살아있던 영화를 최근 다시 보고싶어서 아주 어렵게 DVD를 구하고 보니, 오래전의 영상기술이 현재와 달라서인지 화질이 많이 미흡하긴해도 당시의 감흥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여운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Les Uns Et Les Autres 1981)
음악 : 프란시스 레이, 미셀 르그랑 출연 : 제럴딘 채플린, 제임스 칸, 로베르 오셍셍, 니콜 가르시아, 자크 비유레, 파니 아르당.
1936년에서 1980년까지 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 등 4개국 세기의 예술가들인
1936년 모스크바의 발레 댄서 - Rudolf Nureyev (소련, 발레리나, 1961 망명) 1937년 빠리의 음악가 - Edith Piaf (프랑스, 샹송가수) 1938년 베를린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 Herbert von Karajan (오스트리아, 베를린 필 지휘자) 1939년 뉴욕의 재즈 뮤지션 - Glenn Miller (미국, Jazz Trombonist)
반세기동안 이들이 살아온 기구한 인생역정과 예술세계와 이데올로기 전쟁 그 후의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해서 제작한 영화로 그 치밀한 구성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20세기 빛나는 영화이다.
같은 시간대의 각기 다른 도시에서 살아낸 제2차 세계대전 전후 1936년에서 1980년까지 45년에 걸친 이야기를 <남과 여>의 감독 끌로드 를루슈가 180분짜리 대하 드라마로 만든 대작이다.
그들 자신(지휘자)과 2,3세(댄서, 남녀 가수)들이 1980년 빠리에 모여 펼치는 유니세프 자선 콘서트의 하일라이트인 '볼레로' - 주역 댄서는 조르주 돈 (모델 : 누레예프), 안무를 맡은 모리스 베자르가 이끄는 20세기 발레단 단원들과 함께 춤추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모리스 라벨(Mauris Ravel)이 작곡한 볼레로(Bolero)가 연주되는 가운데 에펠탑 맞은편 트로카데로 광장에 설치된 원형 무대에서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가 남자 무용수들과 함께펼치는 무용 '볼레로' 공연은 파란만장한 네 주인공의 반생이 응축돼 펼쳐지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약 30여년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때와 지금에 와서 다시 보는 감상의 느낌이 달라졌다면, 에펠탑과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펼쳐졌던 이 공연의 현장을 그리고 빠리시내 전경을 몇번의 프랑스 방문으로 눈에 익히고 기억하고 있기에 좀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겠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Les Uns Et Les Autres 1981) 이야기속의 실존 인물들
1937년 빠리의 음악가 - Edith Piaf (프랑스, 샹송가수)
1939년 뉴욕의 재즈 뮤지션 - Glenn Miller (미국, Jazz Trombonist)
1938년 베를린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 Herbert von Karajan (오스트리아, 베를린 필 지휘자)
1936년 모스크바의 발레 댄서 - Rudolf Nureyev (소련, 발레리나, 1961 망명)
일때문에 한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침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6시 30분경이었습니다.
갑자기 온도가 떨어져 약간은 한기를 느끼게 하는 아침 날씨 탓에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 듭니다.
비행기 계류장 뒤편 동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입구 - 햇살이 퍼지면서 주위가 밝아지고 갖가지 사연을 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기위해 속속 출국장을 향해 모여듭니다.
아침 햇살이 출발 수속장 실내에까지 들어와 비칩니다. 인천국제공항 A 카운터에서는 국내선 탑승도 가능하더군요.
비행기 출발시간이 남아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 아침식사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항공사 라운지에 앉아서 밖을 내다 보니 각지로 가는 비행기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20대 초반 군대를 가기전 그리고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전 까지 공항에서 수출입 통관과 관련한 일을 했던 경험과, 사회에 진출하고도 몇년동안 공항에 필요한 보안장비와 각종 디스플레이 기술개발 관련일을 하면서 공항과 인연을 맺었던지라 지금도 공항에만 가면 항상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가며 매우 친숙한 느낌이듭니다.
그리고 간단한 여행용 가방을 챙기고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면 어딘가를 향해 새로운 세계로 간다라는 약간의 설레임과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구나하는 편안함도 곁드려 상쾌한 기분마져 듭니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출발을 기다리며 라운지에서 식사와 차를 마시고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업무를 체크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홍콩쪽 로후(罗湖)역 - 인천공항을 출발 심천에 도착하여 이틀 동안 밀렸던 일을 보고 또 다른 일을 보기 위해 홍콩에 가려고 중국쪽 출국대를 지나서 홍콩쪽 입국 심사를 마치고 홍콩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타기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콩과 중국 심천을 이어주는 홍콩 전철역 플랫폼 모습
로후(罗湖)역에서 홍콩 시내까지 들어가는 전철 실내 모습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로후(罗湖)역에서 침사추이까지 한번에 갔었는데, 전철 노선이 변경 되면서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합니다.
침사추이에서 홍콩섬쪽으로 바라보이는 모습 - 오른쪽으로 낮으막히 동그란 지붕의 홍콩 컨벤션 센터가 보입니다.
이 별다방 2층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아래에 보이는 사진의 풍경 처럼 손에 잡힐듯 보이는 홍콩섬쪽의 멋진 모습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전세계 별 다방중에 이곳 처럼 전망이 좋은 곳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실은 아직까지 홍콩의 날씨가 매우 더워서 낮에는 2층 테라스 보다는 실내의 에어컨 바람이 더 편한데,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별다방을 편하게 즐기려면 야간이 좋습니다.
이소룡, 이 아저씨는 맨날 이자리에 폼잡고 서있는데, 이 자리에 서있는게 아마도 약 3년째 정도 되지 싶습니다. 이소룡 사후 몇십년인가? 아무튼 뭐 그런 의미를 기념해서 이자리에 세운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바다건너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처럼 생긴 홍콩 컨벤션 센터가 보입니다.
위에 보았던 홍콩 컨벤션 센터쪽 분위기와 지금 보는 이 풍경은 전혀 다른 지역을 보고 있는듯 하지만, 위에 보았던 컨벤션 센터 왼쪽 지역으로 보이는 풍경입니다.
해변을 걷다가 날씨가 더워서 땀도나고 목도 말라서 잠시 벤치에 앉아 목을 축이며 쉬는중에 지나가는 여인네의 뒷모습을 살짝 몰카 ~ *)*
석양을 등지고 저 앞에 크루즈 관광선이 보이는군요. 그런데 저 크루즈선은 언제나 저곳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언제 운항을 하는지 알수가 없군요. 바다여행을 위한 크루즈선인지 아니면 모양만 닮은 해상 호텔인지 알수가 없습니다.아마도 아이미슈님은 아실듯 한데....설명 부탁해요. ㅋㅋ
좌측 멀리로 크루즈선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홍콩예술관 광장에 서있는 시계탑이 보입니다.
예술관 시계탑 광장의 휴식공간
홍콩예술관의 멋진 외관 모습
홍콩예술관 측면
홍콩예술관 시계탑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Canton Road로 가는 길목에 있는 상가 모습
이곳 Canton Road로에 있는 듀티프리샵에서 잠시 쇼핑도 하고....... 슬슬 시장기를 느끼면서 식사를 하기위해 아래 청킹맨션쪽으로 이동.
쇼핑가와 환전상이 모여있는 청킹맨션(광동어로 청킹, 보통어로는 총칭따샤) 근방인데, 이곳은 주로 동남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동남아 호객꾼들이 많아서 이곳을 지날때마다 항상 약간은 긴장을 하게되더군요.
청킹맨션을 좀더 가까이에서 들여다 봅니다.
날도덥고 땀은 삐질삐질 여기저기 걷고 걷다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면서 피곤이 엄습해옵니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는 한국식당 三木에 들러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한국식당 三木의 실내 인테리어가 아늑해보입니다. 저는 이미 현지 음식에 충분히 적응이 되어 있기도 하고 한국 식당의 음식값이 대략 좀 비싼편이라 자주 가지는 않지만 이번엔 오랜만에 한번 들러봅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거리로 나섭니다.
거리를 지나며 쇼윈도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쳐다보며, 야간이라 촛점이 흔들렸네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셔터를 눌러봅니다.
홍콩하면 명품 쇼핑을 떠올릴 정도로 다양한 유명 제품들이 즐비합니다. 이집도 쇼윈도를 통해 슬쩍 들여다 봅니다.
지나다 보니 길거리에 재미있는 아이스크림 노점상이 있네요. 조그마한 차량을 길가에 대놓고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럴때 또 촛점이 안맞는군요. ㅠ.ㅠ
휘황 찬란한 조명아래 계속 이어지는 상가들...........
구룡공원 앞을 지나면서 셔터를 눌렀는데, 또 흔들리고 말았네요.
걷는 중에 너무도 더워서 아무곳이나 가까이 있는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땀도 식히고 갈증도 해소합니다.
잠시 쉬는 동안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봅니다. 호텔 천정에 매달려 있는 샹제리등
이렇게 일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심천에서 차한잔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꼬꾸라져 잤습니다. 여러가지 일정때문에 며칠간을 빡빡하게 보내고 지금까지 그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피곤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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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성 심천에 있는 민속촌 입니다.
민속촌이라 하면 용인에 있는 민속촌 처럼 실물과 똑같은 건물과 거리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곳은 많은 부분이 미니어쳐 또는 축소 모형으로 이루어진 민속촌입니다. 많은 부분이 미니어쳐 또는 축소 모형이라서 마치 소인국에 온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축소 모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중국 국토가 넓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 많은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까 미니어쳐를 생각해낸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56개 소수민족이 각자의 고유 문화를 가지고 일부 민족의 경우는 그 소수민족만의 고유 언어(조선족도 이에 속하지요)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주 다양한 민속 문화를 자랑합니다. 56개 민족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보다 더 많은 소수 민족이 존재하는데,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통폐합 되면서 56개 소수민족으로 분류관리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속촌이 미니어쳐 같은 축소형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제의 모습과 똑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영화를 촬영하듯이 확대해서 찍으면 실제의 문화재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진중에는 실제 소수 민족이 자기들의 고유 문화를 보여주는 공연과 생활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나름 이미 알려진 꽤꼬리 목소리를 가진 친구들을 호명할때, 난 당연히 해당없음을 잘 알기에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찰라 귓전으로 들리는 내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바라보노라니 분명 내 이름을 호명하고 있잖은가.
순간, 이건 아닌데 난 어디에서도 남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불러본적도 없고 통신표 음악 과목에 "수"를 받아본적도 없는데, 왜(Why?) 나를 호명 하는 걸까?????
에이~! 저 노츠녀 여선생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게지~!
아무튼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살미국민학교 합창단원이 구성되었던것이었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얘기에 의하면.....빨간색 반바지와 하얀색 상의 그리고 빨간색 모자와 쬐끄만 넥타이 유니폼을 입으면 촌놈들인 친구들이 놀려 댈까봐 누구도 선듯 나서서 저요 저요 저 합창단 시켜주세요...하는 년놈들이 없다 보니 선생님의 직권으로 할만한 남여 학생들을 추렸던 것이었고, 그중에 나는 볼것도 없이 내 누이의 영향으로 저놈은 지네 누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당시 이호일 선생님이 미술 특활반을 지도하고 있었음)
보나마나 노래좀 하지 않을까 라는 이상한 논리로 낙점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달간 나머지 공부하듯 방과후 남아서 합창 연습을 하고, 드디어 충주에서 합창대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전 청평모임때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장병선이도 이때 멤버였다고 했던가?(난 잊고 있었음)
나름대로 열과 성의를 다해 연습하고 출전을 했는데, 산골 촌놈들이다 보니 충주 시내 구경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 충주 시내가 어찌 그리 으리으리하던지 감개가 무량(??) 긴장(??) 초조, 두리번 두리번, 얼굴들은 햇볕에 그을어 까무잡잡하고 촌티가 줄줄 나는 모양새들이라니....
하지만 충주교현국민학교 강당에 모인 다수의 충주시내 학교 경쟁상대들은 얼굴색이 뽀얕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귀티(??)나는 자태, 더하여 이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 ㅎㅎㅎ 에고 비교된다 비교돼~!
긴장에 긴장을 더하여 우리차례에서 합창을 마치고 혹시나 등수안에 들까 싶었지만 혹시가 역시가 되었지만 멀리 시골에서들 왔다고 등외로 위로의(??) 상품을 받았던가 아무튼 그랬다.
내가 서울 살이를 시작 하게된 것은 고등학교를 충주에서 마치고 곧바로 상경을 했던 1978년인지 1979년 초인지싶은데, 그 당시 내가 몇년동안 다니던 회사가 북창동(남대문 시장 길 건너편, 한국은행 뒷편)에 있었는데 한달에 몇번씩 하는 회식때면 한길건너 남대문시장 골목에 있던 닭곰탕을 먹으러 잘 다녔다.
그때의 그집이 아래 기사에 나오는 "강원집"이다.
한국에 가면 반드시 그 강원집 닭곰탕을 먹고말테야 하고 벼르고 별렀건만 아직 못가봤다.
아래 사진의 쭈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닭곰탕 그리고 양념장이 얹어진 모양세는 벌써 몇십년이 흘렀건만 변함이 없다.
더하여 변함없는 그때 그맛을 느낄수 있다라는 기사 내용을 보자니, 몇십년 전에 즐겨 먹던 그맛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입안에 침이 가득고이누나......!
혹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고 검색창에서 버드나무집을 찾으니 온통 강 아래 고깃집만 나온다. 내가 찾으려는 건
주머니 생각하지 않고도 즐겨 먹을 수 있던 닭곰탕집인데도 말이다. 버드나무집은 온 나라 자동차 댓수가 백 만 대 아니 수 십 만
대도 되지 않았을 무렵 우리 귀에 낯선 기사식당이란 단어를 만들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 갈치골목. 그래도 근방에 이렇게 서민이 숨쉴 공간이 남아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낮에는 갈치골목에서 줄서는 일은 다반사이다.
내가 살던 집 골목에서 나오면 바로 버드나무집이 있었는데 항상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지금에야 식당에 식재료를 공급해주는
업체가 따로 있어 거의 비슷한 김치나 깍두기를 이집 가도 먹을 수 있고 저집 가서도 먹을 수 있지만, 식간을 이용해서 배추와
무를 길거리에 쌓아놓고 다듬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구경거리였다.
아줌마들이 아기 목욕통으로 쓸 만한 커다란 함지를 두세 개 갖다놓고 차고 앉아 커다란 연필 깎듯이 배추를 부엌칼로 툭툭
치면 10센티 전후로 제멋대로 잘린 배추조각이 쌓인다. 그 위에 고춧가루, 마늘, 파, 소금, 미원를 뿌리고 벌겋게 버무리는데
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몇 입 나누어 먹어야 될 정도의 크기로 썩썩 잘랐다.
요즘에야 설렁탕집에서 가끔 보는 그런 커다란 깍두기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커다란 깍두기와 배추김치는 거기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원을 넣었는데 그게 무슨 음식이냐고 탓하지 말라. 그 때는 배웠다는 주부들도 거의 모든 음식에 미원을
쳤으니까.
닭고기 기름 많은 것 아시지. 지금에야 '껍질 빼고 기름 빼고'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 양은 냄비에 주욱죽 찢어놓은
닭고기와 육수를 붓고 밥 넣고 다대기 한 숟갈 넣고 펄펄 끓여 파 송송 썰은 것 얹고 커다란 깍두기와 국물 넉넉한 배추김치와
마늘을 곁들여 나오면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드-은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양은 냄비와 닭을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제대로 먹으려면 닭곰탕을 시켜야겠지만 동행이 있으니
닭곰탕만으로는 안주가 되지 않는다. 문간 옆 조리대에서는 방금 삶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닭을 커다란 쟁반 위에 놓고 손으로 뜯어
접시에 담고 있는데 닭 한 마리 시키니 양은냄비에 곰탕국물을 곁들여 준다. 닭국물이 달긴 하지만 미원을 약간 가미한 것 같은
맛과 질긴듯하면서도 졸깃한 닭고기 씹는 맛이 옛 맛과 비슷하다. 국물이 식으면 자동적으로 육수를 첨가해서 다시 끓여주니 맘이
흐뭇하다.
요새야 닭 조리법이 다양해졌지만 튀길 기름조차 귀하던 때에는 그저 푹 삶아 국물도 내고 백숙으로 고기도 뜯어 먹는 것이
제일 간편한 조리법이었을 것이다. 푹 고은 닭을 건져 찬물에 손가락을 식혀가며 다리 비틀어 내어 어른들 몫으로 따로 남겨두고,
닭 날개 뜯어서 '바람 필까봐' 남정네 못 먹게 감추어 두고, 수탉 잡으면 '벼슬하라고' 닭 벼슬은 아들에게 따로 떼어주고,
가슴살은 발라서 국거리로 남겨두고, 뱃속의 미숙란과 똥집은 내가 먹고, 국물에는 대파를 송송 썰어 얹어 내었으니 이만큼 추억과
정감이 배어있는 음식을 보기 쉽지 않으리라.
국밥이라는 것이 체면 차리고 먹는 음식이 아니다. 할 일도 많은데 장소 구애받지 않고 솥 걸어놓고 끓여 사발에 국 푸고 밥
집어넣어 깍두기 하나 놓고 먹는 음식이니 애시당초 점잖게 격식 차리고 먹을 거면 들여다보지도 말아야할 음식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곱창이나 꼼장어처럼 신분 상승된 음식이 하도 많아 아직도 제 분수를 알고 있는 이런 음식을 보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진다.
▲ 약간 질기면서 쫀득한 식감. 무슨 고기인지는 짐작 가지만 질을 따진다면 국밥 자실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