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생전에 계실땐 몰랐는데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신뒤.....자주 보고싶단 생각이 간절해진다.
가슴이 먹먹해질때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나이들어 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국립현충원 경내를 돌아 아버지를 뵙고 나무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코끝으로 느끼면서 무지개 피어오르는 분수를 보고, 전시관을 돌아 해가 뉘엇해질쯤 노량진 수산 시장을 기웃거려 싱싱한 회한점과 쐬주 한잔을 기울이고 왔다.

노량진 수산시장 어느 식당 입구에 씌여진 글귀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더라.

삶의 문제는 견디고 체험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련을 두려워 말자.      - 헤세 -


동작 전철역에 내려서 현충원으로 가는길

현충원 정문을 들어서며...................

현충문과 무명용사 탑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조카들

조카 희재

수많은 영령들

할아버지께 드릴 꽃다발을 안고.....희재

수많은 영령들과 아버지가 모셔진 충혼당

묵념(누나, 어머니)

잠시 그늘에서의 휴식

까치

비둘기

참새와 놀기

휴식의 공간

오리를 만나다

무지개 뜨는 분수

무지개

현충관
(마당 한가운데 바닦에 그려진 방향 표시를 보면 정면이 현충관이고 왼쪽이 사진전시관 오른쪽이 유품전시관이다)

사진 전시관

일제 36년의 항일 투쟁과 6.26 전쟁사에 관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1층 오른쪽에는 역대 대통령들과 간단한 시대상을 설명하는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그 다음으로 이명박 사진이 자리하고 있지만...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없다.

왜일까?

입구에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왜 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빼놓았는가?
공간이 부족해서 란다 ㅠ.ㅠ.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라...내가 보건데 공간은 충분한데 무슨 변명을 그따위로 하냐?
전두환, 노태우가 어떤 인간이냐 당신 그거 알어? 버럭 소릴 질렀다.
왜 유독 노무현 대통령만 빼놓은 이유가 뭐냐?
아뭇소리 못하고 그냥 윗선에 건의 하겠단다. 이런 빌어벅을......!

그러고 나서 맞은편에 있는 "유품 전시관"으로 가서 입구를 들어서면서도 도저히 화가 안풀려서 또 다른 근무자에게 물어봤다.
저 앞에 보이는 사진전시관에 왜 노무현 대통령 사진만 없냐?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한다.
굳이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곧 리모델링할 예정이라 ..........
...그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 안될테니....  라며 말끝을 흐린다.
무슨놈의 변명을 그따위로 하냐?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계시던 5년과 퇴임 1년반 동안 적어도 6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너희들이 직무유기를 했다는 것밖에 더있느냐?
더구나 현직 대통령 사진을 새로 걸었다면 왜 직전의 노무현 대통령은 없는것이냐?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 근무자에게서 더 이상의 정확한 답변과 이유를 듣는다는게 무의미하게 생각되어.....그렇다면 이곳을 관할하는 부처나 담당 부서 책임자 연락처를 내놔라...라고 하여 전화번호를 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훈 선양팀 전화 02-815-0625
이 문제를 분명하게 따져볼참이다.

갑자기 생각난것 하나
그들은 뭐라고 또 변명을 할까?
생존해 있는 사람만 사진을 걸어 놓은 것이다라고 할까?
그래도 그건 안될껄?
액자 형태로 걸어놓은 사진도 아니고 벽지처럼 만들어진 즉, 인쇄되어진 벽보 형태의 연대별 표시가 되어있고 더더구나 최근 몇주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걸.
두고볼일이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유품전시관" 이다. 즉 사진전시관 맞은편 건물이다.

꺼먹고무신과 운동화~!

국민학교 3학년때인가 싶다.
학교전체 학생수가 1,000여명정도 되었는데 90%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어쩌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만이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연년생인 누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늘  할머니에게 용돈을 타며 서로많이 가지려고 잘도 다투었다.
당시 충주 지방에서는 담배를  주생산으로 농가가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집도 담배농사가 가장 중요한 주수입원이었다.
여름내내 담배잎을 따서 말리고 겨울동안 손질하여  전매청(지금의 담배인삼공사)에서 수매하는  공판에 내다팔아  주수입원으로 했는데 담배를 팔러가는날  아버지는 여지없이  담배껌(담배까치 처럼 생긴껌)을 사다주시곤했다.

그러던 어느해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해였을거다.
그날도 바램은 아버지가 껌을 많이 사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난데 없이 운동화를 사오신거다.
우~~~와.......신나는거~!
다음날 보무도 당당히(??) 등교를 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교실복도에 신발장이 있어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운동화가 한켤레씩 없어지기 일수였는데, 내 운동화라고 온전할까 하는 걱정때문이었다.

수업시간이 되어도 온통 신경은 신발장이 있는 복도로만  쏠리고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밖에는 겨울날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렇게 온종일을 보내며 마지막 수업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뿔싸~~~~!   하루종일 쏟은 마음 졸임도 아랑곳 없이 신발장의 내 운동화는 온데간데 없었다.
밖에는 눈마져 내려 미끄럽기 그지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인가.
학교건물을 몇바뀌 돌고돌아 혹시라도 내 신발이  있을까...그러나 헛일~  찾는걸 포기하고 다떨어져 헤진 꺼먹고무신이라도 있으면 줏어 신으려 했으나 그날따라 그것마져도 눈에 띄지를 않았다.
집에까지는 비포장 자갈길로 십리는 되고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어 차를 타고 간다는것은 엄두도 못내고 더더구나 산골짜기 시골이다 보니 어디가서 사정을 이야기 할곳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선생님에게 그 사정이야기를  못했던지.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당시의 어린 마음 이었지 싶다.

어쩔 수 없이 한학년 위인  누나네 반으로가서 기웃기웃 "누나 나 신발 잃어 버렸어 " " 아이고 어쩌니? "
궁리에 궁리를 하여 누나와 신발을 교대로 바꿔 신어가며 걸어가기로 했다.

한번은 내가 누나 신발을 신고 누나는 맨발로 걸어서 한50여  미터를 가다가 " 누나 발시려워? "
" 응 "
" 그럼 바꾸자 "
그리고 한번은 누나가 신발을  신고 50여 미터를.....나는  맨발로....눈위에서 맨발로 미끄러지며....넘어지고....발가락은  얼어서 빨갛게 물들어가고....이러기를 두어시간........집으로 돌아와서는 섧도록 울었던 그 생각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도록 생각 난다.

핏줄이라는게 무엇인지.....어리다면 어린 나이의 두 남매....싫다하지 않고 내게 힘이되어준 누나가(불과 한살위인데도) 지금도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다.

살면서 누구에겐가 몇번 내 이런 기억을 반복하여 들추어 보여주었고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또 이야기 하겠지.
삶의 연이란 다그러려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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