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3일 동창모임 카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아마도 국민학교 4학년때 였지 싶은데,

오후 수업시간에 키가크고 광대뼈가 살짝 나온 멋쟁이 송석희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노래 잘하는 사람을 뽑는단다.

나름 이미 알려진 꽤꼬리 목소리를 가진 친구들을 호명할때, 난 당연히 해당없음을 잘 알기에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찰라 귓전으로 들리는 내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바라보노라니 분명 내 이름을 호명하고 있잖은가.

순간, 이건 아닌데 난 어디에서도 남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불러본적도 없고 통신표 음악 과목에 "수"를 받아본적도 없는데, 왜(Why?) 나를 호명 하는 걸까?????

에이~! 저 노츠녀 여선생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게지~!


아무튼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살미국민학교 합창단원이 구성되었던것이었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얘기에 의하면.....빨간색 반바지와 하얀색 상의 그리고 빨간색 모자와 쬐끄만 넥타이 유니폼을 입으면 촌놈들인 친구들이 놀려 댈까봐 누구도 선듯 나서서 저요 저요 저 합창단 시켜주세요...하는 년놈들이 없다 보니 선생님의 직권으로 할만한 남여 학생들을 추렸던 것이었고, 그중에 나는 볼것도 없이 내 누이의 영향으로 저놈은 지네 누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당시 이호일 선생님이 미술 특활반을 지도하고 있었음)

보나마나 노래좀 하지 않을까 라는 이상한 논리로 낙점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달간 나머지 공부하듯 방과후 남아서 합창 연습을 하고, 드디어 충주에서 합창대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얼마전 청평모임때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장병선이도 이때 멤버였다고 했던가?(난 잊고 있었음)

나름대로 열과 성의를 다해 연습하고 출전을 했는데, 산골 촌놈들이다 보니 충주 시내 구경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 충주 시내가 어찌 그리 으리으리하던지 감개가 무량(??) 긴장(??) 초조, 두리번 두리번, 얼굴들은 햇볕에 그을어 까무잡잡하고 촌티가 줄줄 나는 모양새들이라니....

하지만 충주교현국민학교 강당에 모인 다수의 충주시내 학교 경쟁상대들은 얼굴색이 뽀얕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귀티(??)나는 자태, 더하여 이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 ㅎㅎㅎ 에고 비교된다 비교돼~!


긴장에 긴장을 더하여 우리차례에서 합창을 마치고 혹시나 등수안에 들까 싶었지만 혹시가 역시가 되었지만 멀리 시골에서들 왔다고 등외로 위로의(??) 상품을 받았던가 아무튼 그랬다.


이제 그당시에 합창단 멤버였던 친구들 손좀 들어봐라........!


아마도 장변선, 민광기.....다른 친구들 자수좀 해보시게나들


요 며칠 바빠서 잠도 부족하고, 오전에는 거래처 순회, 잠시전에 돌아와 커피한잔 마시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합창단의 기억을 끄집어 내본다네.
꺼먹고무신과 운동화~!

국민학교 3학년때인가 싶다.
학교전체 학생수가 1,000여명정도 되었는데 90%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어쩌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만이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연년생인 누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늘  할머니에게 용돈을 타며 서로많이 가지려고 잘도 다투었다.
당시 충주 지방에서는 담배를  주생산으로 농가가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집도 담배농사가 가장 중요한 주수입원이었다.
여름내내 담배잎을 따서 말리고 겨울동안 손질하여  전매청(지금의 담배인삼공사)에서 수매하는  공판에 내다팔아  주수입원으로 했는데 담배를 팔러가는날  아버지는 여지없이  담배껌(담배까치 처럼 생긴껌)을 사다주시곤했다.

그러던 어느해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해였을거다.
그날도 바램은 아버지가 껌을 많이 사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난데 없이 운동화를 사오신거다.
우~~~와.......신나는거~!
다음날 보무도 당당히(??) 등교를 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교실복도에 신발장이 있어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운동화가 한켤레씩 없어지기 일수였는데, 내 운동화라고 온전할까 하는 걱정때문이었다.

수업시간이 되어도 온통 신경은 신발장이 있는 복도로만  쏠리고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밖에는 겨울날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렇게 온종일을 보내며 마지막 수업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뿔싸~~~~!   하루종일 쏟은 마음 졸임도 아랑곳 없이 신발장의 내 운동화는 온데간데 없었다.
밖에는 눈마져 내려 미끄럽기 그지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인가.
학교건물을 몇바뀌 돌고돌아 혹시라도 내 신발이  있을까...그러나 헛일~  찾는걸 포기하고 다떨어져 헤진 꺼먹고무신이라도 있으면 줏어 신으려 했으나 그날따라 그것마져도 눈에 띄지를 않았다.
집에까지는 비포장 자갈길로 십리는 되고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어 차를 타고 간다는것은 엄두도 못내고 더더구나 산골짜기 시골이다 보니 어디가서 사정을 이야기 할곳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선생님에게 그 사정이야기를  못했던지.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당시의 어린 마음 이었지 싶다.

어쩔 수 없이 한학년 위인  누나네 반으로가서 기웃기웃 "누나 나 신발 잃어 버렸어 " " 아이고 어쩌니? "
궁리에 궁리를 하여 누나와 신발을 교대로 바꿔 신어가며 걸어가기로 했다.

한번은 내가 누나 신발을 신고 누나는 맨발로 걸어서 한50여  미터를 가다가 " 누나 발시려워? "
" 응 "
" 그럼 바꾸자 "
그리고 한번은 누나가 신발을  신고 50여 미터를.....나는  맨발로....눈위에서 맨발로 미끄러지며....넘어지고....발가락은  얼어서 빨갛게 물들어가고....이러기를 두어시간........집으로 돌아와서는 섧도록 울었던 그 생각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도록 생각 난다.

핏줄이라는게 무엇인지.....어리다면 어린 나이의 두 남매....싫다하지 않고 내게 힘이되어준 누나가(불과 한살위인데도) 지금도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다.

살면서 누구에겐가 몇번 내 이런 기억을 반복하여 들추어 보여주었고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또 이야기 하겠지.
삶의 연이란 다그러려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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