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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에 계림을 다녀온 후 다른 곳 게시판에 썻던 글을 가져와서 올려봅니다.


"무릉도원 가는 길, 리강(離江)"

 

계림의 리강(LI JIANG)은 옛 진나라 진시황의 군수물 수송을 하던 강이었다. 그 경관이 수려하여 몇 억년의 흐름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산마다 동굴이 발견되고 있는데 리강의 4보는 다음과 같다.1)桂花魚(민물고기) 2)물소 3)가마우찌 4)鳳竹

 

중국의 남쪽을 화남(華南)지방이라고 하는데 북쪽에 비해 기후가 따뜻한 것은 물론이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3억년 전에는 바다 밑이었는데 지각변동에 의해 치솟은 카스트지형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15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계림에서 시작하여 양삭까지 60km에 이르는 리강의 물길을 따라서 중국 옛시인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을 찾아 나서는듯한 착각에 젖어보자

- 위 글은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

 

위 설명에 있는 계림이라는 곳을 3월 9일 기차를 타고 갔다가 13일 돌아왔습니다.

중국은 국토가 대단히 큰나라여서 보통 출장을 다닐때는 대부분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는데 이번의 경우는 여행길이라 중국에와서 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했습니다.

편도 15시간이 걸리는 긴 기차 여행이라서 침대칸을 이용했는데 대부분 한국인들 중국 여행기에 보면 중국 기차 여행시 침대칸의 종류와 서비스 그리고 가격과 중국인들 습성 뭐 그런것들은 잔뜩 있는데 정작 실내 구조 & 모습을 볼수 있는 사진이 없어서 갈때와 올때 서로 다른 실내 모습을 찍어봤습니다.

 

위에 설명에도 나오지만 우선 기차를 타고 계림에 도착하면 리강(강이름으로 중국어로는 리장이라고 함)이라는 강 하류쪽에서 배가 출발을 (계림은 리강의 강 하류쪽에 위치해 있음) 하여 양삭이라는 곳쪽으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겁니다.

동절기에는 갈수기라서 강물수위가 낮아지기 때문에 3~4시간 정도 배가 운행이 되며 하절기에는 5~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그만큼 긴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볼수 있습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오는 날씨여서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배를 타고 경치 구경을 한 다음날은 자전거 하이킹을 했는데(현지에서 빌려탐...세계각국의 많은 여행자들이 오는 곳으로 자전거 하이킹을 많이 하더군요) 뭣모르고 따라 나섯다가 족히 40Km를 열심히(??) 탓고 돌아오는 길에는 중간 중간 볼거리가 있는 곳을 들러서 놀면서 보면서 그리고 농촌식 식사도 하고 합니다.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계림으로 갈때의 침대칸 입니다.(침대가 3층구조로 2개면이 마주바라보고 있어서 한칸에 6명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 완전 개방형 스타일입니다.

 

계림에서 기차를 타고 심천으로 돌아올때의 침대칸 입니다.(침대가 3층구조로 2개면이 마주바라보고 있어서 한칸에 6명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약간은 실내구조를 갖추고 있는 스타일이며 좀더 편리한 구조 입니다.

 

돌아올때 기차 침대칸 실내 모습(쓰레기 통도 보이고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녹차를 마시던가 긴여행시 사발면 같은걸 먹을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받아두는 보온병도 있습니다)

워낙 긴시간 이동이라 기차에서 과일과 음식(도시락), 녹차, 담배 등등 판매를 하더군요.

저는 사발면을 사가지고 가서 기차에서 식사 대용으로 해결했습니다.(중국에서는 농심 라면이 유명한데 완전히 한국맛 그대로)

 

잠들기전에 복도에 나와서 조그만 의자에 앉아 환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중국인들 여가 문화는 한국인들 화투처럼 포커 놀이와 마작놀이가 주를 이룹니다.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서 포커를 칩니다 / 남여노소 누구나 즐기는 국민 여가활동(??) / 같이 갔던 일행들입니다.(전부 중국인들로 20여명이 동행함)

아쉽게도 저는 할줄아는 잡기가 전혀 없어서 멀뚱히 구경만.........ㅎㅎㅎㅎ

이번 여행을 통해서 중국인들의 평소 대화나 여가 문화 그리고 그들의 평소 생활 태도등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던 것들을 더욱 많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묵었던 호텔 모습

 

호텔 로비에서 찍은 여행지 지도

 

산중턱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중국인들은 달빛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더군요---웰량산)

달이 뜰때 저 동그란 구멍으로 달빛이 비칠때 가장 아름답다네요.

매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멍 같은데...순수 자연적인 구멍이랍니다)

 

계림과 양삭이라는 곳은 사방 둘러 보아도 산들이 보이듯 뾰족뽀족한데....일설에 의하면 이런 산이 족히 3만개는 된다고 하는데 사방을 둘러 보아도 대부분  뾰족뽀족한데 이러한 산들 골짜기마다 건물들이 들어서있는 동네입니다.(묵었던 호텔 앞 풍경)


호텔과 가까이 보이는 산들....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런 풍경들을 3~4시간 동안 만날수 있습니다.

 

배에서 바라본 구마산(아홉마리의 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산)...희끗해보이는 바위와 검은 부분들을 잘보면 말 아홉마리를 발견할수 있다고 하네요.

 

 

한국 TV에서도 삶의 체험 현장에 나왔던.....가마우지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

 

 

 

 

배에서 식사를 제공하는데 배후미쪽에 주방을 차려놓고 식사를 준비합니다.


광화문 뒷골목을 돌아 늦은 밤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동아방송의 간판이 내려지기 전까지 들을 수 있었던 밤의 귀기울임을.......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을 지요?

"밤의 플랫폼" 시간대는 정확히 기억이 않나지만.....아마도  10시 50분에서 11시 정각까지 김세원씨의 촉촉이 젖은 듯한 목소리에 실려 울려 퍼지던 명상의 언어들은 어쩌면 따뜻한 인간의  품속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지 싶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기차의 고동소리 그리고 어느 역의  플랫폼을 연상케 하는 언어들로부터 시작되는 Logo 멘트 그날그날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많은 위안과 희망을 그리고 젊은이의 가슴 가슴 마다에 아름다운 언어를 심어주던 그 시절 그녀의 목소리를 사랑했기에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읽는다.

그후 몇 년뒤 밤의 플랫폼에서 김세원씨가 낭송해주던 수필 내용이 동명의 책으로 엮여저 나왔고 그 글을 읽으면서 혹시나  편입된 KBS 어느창고에 당시의 녹음테잎이라도 있다면 복사라도 해줄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었다.  지금도 그생각은 간절하다.

충무로에는 "필하모니" 종로에는 "르네상스"....가정용  오디오가 귀족들의 신분 과시용으로 취급되던 시절 가난한 서민들의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했던 전문 Classic 음악감상실.....어느해 부터인가 가정용 오디오가 흔하게 보급되고 음악 다방들이  자취를 감출 무렵 이 음악 감상실도 적자를 이유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중앙일간지 문화면에 얼마간 아쉬움으로 기사화 되고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되어버린 지금 충무로나 종로를 지나칠
때면 그때의 감상적이던 추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필하모니 옆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연극인 추송웅씨가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빅히트를 쳤던 연극을 공연하는 소극장도 있었는데 그가 고인이 된후 이 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는데 옛날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말한다.
명동과 충무로가 낭만은 사라지고 상업화만 물밀듯이 들어와  삭막하기 그지없다고......관연 그렇구나 하는 것을 이 나이에  나도 옛날과 비교하여 보자면 서글프기도 하다.

학교 다니던 시절 일주일에 나흘은 강의가 끝나고 필하모니로 출근을 하다 시피 했고 앞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있고 의자  배열과 흐릿한 조명은 영화관의 그것과 꼭같았다. 대부분의 토요일은 짧게는 4시간 길게는 10시간 가까이 Classic음악과 당시에 귀하던 비디오로 틀어주던  오페라, 발레, 음악연주실황  장면들을 듣고 보면서 그 세계의 모든 것을 사랑했었다.

그러다가 실증이 나면 종로로 가서 르네상스의 한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음악을 듣다가 문을 닫을때쯤 쫒겨나다시피 물러 나오던 그런 낭만도 있었는데....지금 그 자리에는 낯모르는 세계로  변해있어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방송인 황인용씨가 운영하는  전문 Classic 음악 감상실이 새로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언제 한번 일삼아서라도 찾아가 보고 싶다.

혼자서 음악을 즐기던 그때 그시절이 그립다

2000년 9월 초가을 어느날 운전을 하면서 KBS 1FM 김세원의 클래식 방송을 듣다가 사연을 보내면 음악 공연 티켓을 준다는 소리를 듣고 KBS 1FM 웹사이트 게시판에 적었던 나의 음악 생활 내용중 일부.....그리고 당첨 안내글 (응모에 당첨되어서 티켓을 받았는데 예술의 전당 가장 앞자리 제일 좋은 좌석을 받았음 ㅎㅎㅎ)



산골마을 하늘만 빠끔한 산천을 끼고 있는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음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살다가 사춘기 시절 즈음 우연히  듣게된 지방 방송국의 심야음악 방송에 심취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잡음이 섞여있는 좋지 않은 성능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서 이었지요. 그러나 FM 음악 방송이라는 건 먼 남의 나라 이야기 인줄로만 알았다. 당시 지방 방송국에서는 FM 음악 방송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에 서울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FM 음악 방송이 있는데 음질도 좋고 음악도 좋은 게 많다고 하던 말을 듣고는 마냥 도회를 동경했던 적도 있었고 POP 이나 외국음악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어느 해이던가 서울에 올 기회가 있을 때 처음으로 FM 음악 방송이 어떤것인지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서울 살이가 시작되면서 POP 과 Classic을 통해 귀가 트이기 시작했고, 도회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쓸때 애착을 가지기 시작한게 Classic 음악이었다.

당시 충무로에 있던 음악 감상실 "필하모니"와 그 위층에 있던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님의 작업실과 그 옆건물에 있던 "빨간피터의 고백" 이라는 연극의 영원한 주인공이었던 추송웅님의 공연장이 있었고 종로에는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가 마음을 달래주고 음악의 깊은 심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며 연극,발레,교향곡,오페라 아리아 또는 첼로,바이얼린,피아노등등의 음률을 가늠하게 만들어도 주었으며 공연 문화에 목마름을 해갈하는 유일한 안식처이었던 추억이 있다.
음악 감상실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7~8시간 많게는 10시간 가까이 가슴을 적시곤 했는데.....지금은 그런 향수가 담겨 있는 그곳이 기억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할 뿐......!

종종 Classic 음악 방송에 엽서 신청 곡을 보내기도 했고 운 좋게도 가끔은 상품을 받는 기회도 있었지만 오디오가 발달하고 통신이  발달 하면서 과거의 엽서에 담은 음악 신청은 멀어지고 말았지만 음악에 대한 관심과 느낌은 변함 없이 세월을 굽이쳐가게 한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일이 바쁘고 문화생활의 여유를 느끼기엔 다소 벅찰 정도의 업무 때문에 밀쳐두고 있지만 때때로 컴퓨터의 MP3를 통해 Classic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 하기도 한다.

가끔은 친구와 가족을 위해 멘트를 섞어 인터넷 방송을 하곤 합니다.
더불어 퇴근길에 잠시잠깐 김세원씨의 촉촉이 젖은 듯한 음성을  들으며 음악을 감상하고...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동아방송 "밤의 플랫폼"이라는 프로에서 김세원씨 목소리가 심금을 적시던 기억을 하곤 합니다.

아무튼 이런 기회를 빌어 가슴 절절히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그때를 회상함이 아련한 추억을 반추하게 합니다.

---- 중  략 ----

당첨 증명서 ㅋㅋㅋ


2000/09/25 (17:38) from 210.115.222.2' of ...'  Article Number : 103 
  담당자  Access : 22 , Lines : 16 
안너빌스마 첼로 독주회 담첨자 명단 
당신의 밤과음악

안너빌그마 첼로 독주회
9월29일(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오후 7시30분

문의:서울(주)빈체로 강은경

축하드립니다.....
개별적으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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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먹고무신과 운동화~!

국민학교 3학년때인가 싶다.
학교전체 학생수가 1,000여명정도 되었는데 90%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어쩌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만이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연년생인 누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늘  할머니에게 용돈을 타며 서로많이 가지려고 잘도 다투었다.
당시 충주 지방에서는 담배를  주생산으로 농가가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집도 담배농사가 가장 중요한 주수입원이었다.
여름내내 담배잎을 따서 말리고 겨울동안 손질하여  전매청(지금의 담배인삼공사)에서 수매하는  공판에 내다팔아  주수입원으로 했는데 담배를 팔러가는날  아버지는 여지없이  담배껌(담배까치 처럼 생긴껌)을 사다주시곤했다.

그러던 어느해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해였을거다.
그날도 바램은 아버지가 껌을 많이 사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난데 없이 운동화를 사오신거다.
우~~~와.......신나는거~!
다음날 보무도 당당히(??) 등교를 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교실복도에 신발장이 있어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운동화가 한켤레씩 없어지기 일수였는데, 내 운동화라고 온전할까 하는 걱정때문이었다.

수업시간이 되어도 온통 신경은 신발장이 있는 복도로만  쏠리고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창밖에는 겨울날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렇게 온종일을 보내며 마지막 수업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뿔싸~~~~!   하루종일 쏟은 마음 졸임도 아랑곳 없이 신발장의 내 운동화는 온데간데 없었다.
밖에는 눈마져 내려 미끄럽기 그지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인가.
학교건물을 몇바뀌 돌고돌아 혹시라도 내 신발이  있을까...그러나 헛일~  찾는걸 포기하고 다떨어져 헤진 꺼먹고무신이라도 있으면 줏어 신으려 했으나 그날따라 그것마져도 눈에 띄지를 않았다.
집에까지는 비포장 자갈길로 십리는 되고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어 차를 타고 간다는것은 엄두도 못내고 더더구나 산골짜기 시골이다 보니 어디가서 사정을 이야기 할곳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선생님에게 그 사정이야기를  못했던지.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당시의 어린 마음 이었지 싶다.

어쩔 수 없이 한학년 위인  누나네 반으로가서 기웃기웃 "누나 나 신발 잃어 버렸어 " " 아이고 어쩌니? "
궁리에 궁리를 하여 누나와 신발을 교대로 바꿔 신어가며 걸어가기로 했다.

한번은 내가 누나 신발을 신고 누나는 맨발로 걸어서 한50여  미터를 가다가 " 누나 발시려워? "
" 응 "
" 그럼 바꾸자 "
그리고 한번은 누나가 신발을  신고 50여 미터를.....나는  맨발로....눈위에서 맨발로 미끄러지며....넘어지고....발가락은  얼어서 빨갛게 물들어가고....이러기를 두어시간........집으로 돌아와서는 섧도록 울었던 그 생각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도록 생각 난다.

핏줄이라는게 무엇인지.....어리다면 어린 나이의 두 남매....싫다하지 않고 내게 힘이되어준 누나가(불과 한살위인데도) 지금도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다.

살면서 누구에겐가 몇번 내 이런 기억을 반복하여 들추어 보여주었고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또 이야기 하겠지.
삶의 연이란 다그러려니 하면서....

♣ 슈레이티 비티 압둘라

누구나 첫사랑이라는 기억으로 떠올려 지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가슴앓이 같은 모습이 아닐런지.......!
꿈속에서 만났던 아름다움 처럼 기억속에만 존재하지만 평생 떠올릴 수 있는 잠재 의식 속의 그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에게 굳이 너의 첫사랑은 어떤 색깔이었더냐 라고 물어본다면, 지금까지 단한번 만나지도 못했고, 단한번의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고, 단한번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기회 조차 없었던 "슈레이티 비티 압둘라"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머나먼 타국 사람이 그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컴퓨터 통신이 발달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던 그런시절이 아니고 오로지 손으로 쓴 손글씨에 테두리가 빨강파랑으로 둘러쳐진 국제 우편으로만 존재하던 그러한 추억은......

고교 1학년때 우연히 모 해외펜팔 소개소에서 소개받은 사람이 말레이지아 소녀였는데 나이가 동갑내기였다.
당시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를 꿰어맞춰 개발새발(??) 되지도 않는 문장으로 보내는 내 편지에 매우 성실히 답장을 보내오는 그녀였다.
나이 50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외국인 포함)의 영문 필적을 봐왔지만 아직까지도 그녀처럼 예쁜 손글씨를 쓰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원래가 한글 쓰기 조차도 소문난 악필인 내가 그녀의 필적에  대적할만한 솜씨로 쓸 자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당시 내딴에는 이쁜 글씨를 쓰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생각이 난다.

그러던 어느날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사진을 받아들고 무척이나 신기해 했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그리고 또 군대가서 까지도 몇번의 편지가 이어졌는데  어느날인가의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을 했고 남편은 여행사 직원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후로 군대를 제대하고 한두번 오가던 편지가 끊겨 더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늘 자신을 자기가 좋아하는 "Sue"라는 애칭으로 불러 달라던 그녀였고 동남아시아인 특유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인형처럼 아름답던 모습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말레이지아의 페낭 이포라는 주소만 기억하고 있을뿐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알수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라 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빈번하게 해외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유독 말레이지아엔 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혹여 언젠가 말레이지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찾아보리라 했지만 아직까지도 기회가 없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편지속에만 존재하던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의 친구들 처럼 늙은 모습일까 만나보고 싶다...얼마나 변했을지 나는 지금도 그녀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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